본문 바로가기

역사IN드라마/선덕여왕

선덕여왕, 신라에서 백제 특산물 황칠을 찾는 수나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수나라 사신단이 진평왕에게 요구한 것은 '황칠'이였다. 황칠이 무엇이길래 수나라 사신단이 꼭 집어서 '황칠'을 요구했을까? 그렇다면 황칠이 고대 상고시대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황칠과 명광개

백제의 법은 반역한 자는 목을 베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사람을 죽인 자는 세명의 노비를 보내어 속죄케 한다.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하면 그 물건의 세 배로 갚게 하고, 종신토록 가두어 둔다. 풍속은 고구려와 같다. 세곳의 섬에서 <황칠>이 나는데, 6월에 나무에 구멍을 뚫어 진을 모으면 색이 금빛이 난다.

무덕 4년(621년)에 왕 부여장(무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과하마를 바쳤다. 이로부터 조공을 자주 바쳐 오니, 고조는 그를 책봉하여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삼았다. 5년 뒤에 명광개를 바치고, 또 고구려가 조공의 길을 막는다고 호소하였다. 태종 정관(627-649)초에 사신을 보내어 두 나라 사이의 원한을 풀게 했다. 또 신라와 대대로 원수가 되어 자주 서로 침공하였다. . - 신당서 백제전

신라 선덕왕 14년, 고구려 보장왕 4년, 백제 의자왕 5년

당(唐)나라 정관 19년  이세민

645년 이때에 백제에서 금개(金鎧 - 금적색(金赤色)를 바쳤고, 또 현금(玄金 - 쇠[鐵])으로 문개(文鎧 - 무늬 있는 갑옷)를 만들어 사졸들에게 입혀 따르게 하였는데, 당 태종이 이세적과 만나자 갑옷의 광채가 해에 빛났다. - 삼국사절요

고구려가 주필산 전투에서 대패했을 때 당나라가 얻은 뇌획물 중의 일부이다.

말 5만 필(匹), 소 5만 두(頭), 명광개(明光鎧) 1만 령(領)을 얻었는데, 다른 기계(器械)들도 상당하였다. - 삼국사절요



황칠은 백제의 3섬에서 나오는 특산물이다, 그 빛은 황금빛이 난다고 하였다. 황칠을 갑옷에 칠하면 햇빛에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났다고 전한다. 그래서 황칠을 한 갑옷의 이름이 <명광개>가 된것이다.

사극에 등장한 각종 명광개

(연개소문의 명광개)

( 바람의 나라 장군의 명광개 )

( 자명고, 호동의 뒤로 보이는 황금빛 명광개 )

사극에서는 시대에 상관없이 명광개(금채개)가 등장한다. 사극에서 갑옷입은 군인들이 나온다면 지위 고하에 따라 대부분 명광개를 입고 있다고 보면 된다. 갑옷의 형태의 고증은  제외하고,  백제의 특산품인 황칠이 시대에 관계없이 등장할 수 있을까? 명광개를 진짜금이나 금도금이나 아말감 기법으로 금장식을 했다면 모르겠지만,  절대 그리 될 수 없다. 역사서에는 마한이 지배하고 있던 한반도 서남해안을 백제 온조왕시기로 보고 있지만, 실효적 지배를 한 시기는 그보다 한참후인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말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나라에서는 백제에서 626년 처음 명광개를 보낸것으로 보아 이때 처음 사용되어진 것 같다. 이후 당태종(이세민)이 645년 고구려 정벌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명광개를 입고 참전을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군에서도 명광개가 보인다. 그것도 1만개의 명광개를 전리품으로 획득할 정도로 많이 있다. 바싼 황칠을 한 것을 보면 고구려군들의 주력군이 아니였을까한다. 말위에 황금빛 갑옷을 입고 햇빛에 반짝거리며 달리는 고구려 군의 모습을 상상을 해라. 얼마나 멋진 모습이 아닌가?

신라에서 백제의 황칠을 찾는 수나라 사신단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수나라 사신단이 황칠을 신라의 진평왕에게 교역품으로 요구를 하고 있다. 신라에는 황칠 자체가 생산되지 않고 있다. 신라가 황칠을 수나라에 줄 수 있는 방법은? 위에서 황칠은 백제의 남해 극히 작은 3개의 섬에서만 나는 백제의 특산물이다. 백제로 부터 수입해서 주는 방법밖에는 없다. 하지만 수나라 입장에서 백제에 요구하면 될 것을 왜 신라에 요구하는 것일가?  <선덕여왕> 드라마 작가가 황칠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거나 얼추 들었던 이야기를 드라마에 전목 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한마디로 남의 다리를 열심히 긁고 있는 형국이다. 

<선덕여왕>에서는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상징으로 알고 있던 # 을 신라가 아막성 전투에 사용한 전력도 있다.
자세한 사항은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화랑 신화창조의 성지 아막성, 광개토태왕의 # 을 참조 바란다.



그렇다면 신라에는 황칠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물론, 백제에서 수입해서 사용했다. 황남대총에서 나온  황칠한 유물중 해남산 황칠나무라는 결과도 있다. 황금빛나는 '칠'이라면 금을 대용하고도 남는다. 불상에 접목하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쓰일 곳은 무진장 하다. 황칠은 방충과 방향제 역할도 한다. 하지만 신라가 황칠을 접수한 시점은 백제를 점령한 이후가 되어야 한다.  

신밧드의 모험으로 유명한 시기에 아랍에서 신라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아랍인의 눈에 비친 신라는 9개의 섬으로 되어있고, 그곳에서는 길가는 개가 금목걸이를 하듯이 금이 넘처 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를 섬나라로 인식한 아랍인의 지리적 인식이 웃기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던 아랍에 까지 신라의 모습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을까한다.

이제 황칠과 명광개에 대해서 설명했으니 백제를 점령한 통일 신라시대에는 개도 금목걸이를 하고, 밥그릇도 금색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라가 금관으로 유명하니 당시 신라에 금이 다량 출토 되었을 것이라는 환상은 벗어 나야 한다.  실제 아랍인의 눈에서 비치  '황금'제품들의 다수는 요즘으로 말하면 '짝퉁', '가라' 황금인 것이다. 

황칠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천년의 금빛 '황칠나무'…전설의 베일을 벗다

서남해안 해남, 보길도, 완도 등 섬에서 극히 미량의 황칠옻나무가 서식하고 있는 것을 확인 했다고 한다. 고기록으로 전해진 황칠옻이 드디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최근엔 황칠를 농업의 소득과 산업화를 위해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 이전 댓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