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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쉰동 꿈꾸는 삶

그 동안 덕만이 진평왕의 뒤를 이어 천명을 제치고, 왕위를 이은 이유를 이전 기사들에서 충분히 증명하고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위의 글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명과 덕만은 이복자매간이다.
둘째, 천명이 나이는 많지만 정비인 마야의 소생은 아니다.
셋째, 덕만은 진평왕과 정비 마야의 장녀다.
넷째, 천명은 덕만보다 왕위승계에서 후순위다. 
다섯째, 덕만은 왕위를 오를때 현재 이요원만큼 어렸다.
여섯째, 덕만은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했다
.


(c) mbc 사극 선덕여왕, 칠숙과 소화

이제 미실의 충복으로 설정된 칠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충실한 충복으로 덕만을 제거하기 위해 머나먼 사막까지 추적하여,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불길속에서 눈의 각막이상으로 실명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덕만의 유모인 소화를 사막의 개미지옥같은 유사에서 구하고, 사랑하게 된다.
 
앞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칠숙과 석품이 어떠한 과정을 걸쳐서 반란을 일으키는 지는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진평왕 말년에 석품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칠숙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이다.

드라마와는 다르게 칠숙은 미실의 충복이 아니라, 신라의 왕위계승권에서 최고 우선권이 있었지만, 진평왕이 덕만을 왕위에 올리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진평왕이 미리 칠숙의 반란을 눈치채고, 칠숙을 잡아들여 9족을 멸한다. 칠숙과 같이 반란에 동조하고 참여했던 석품은 백제로 도망치다가 가족이 그리워, 경주(서라벌)로 돌아와 집에서 잡혀 죽게 된다.


삼국사기에 칠숙의 반란 기사를 살펴보자.

631년 여름 5월에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꾀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시(東市)에서 목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다가 처와 자식을 보고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는 걸어 총산(叢山)에까지 돌아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해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 삼국사기 본기 신라 진평왕 53년 

칠숙이 반란을 일으킬때 직위를 살펴보자.. 이찬은 명예직에 가까운 상대등, 각간 등에 뒤이은 실질적인 일인자인  2등위의 신라 최고급 지위이다. 아찬 석품은,  대아찬 바로 밑인 6등위의 고위직에 있었다. 이들이 아들이 없는 진평왕 말년에 왕위계승권을 놓고, 덕만과 충돌하는 것이다.

칠숙의 지위로 볼때, 칠숙은 왕실과 최측근 사람이다. 석품 또한, 직.간접적으로 왕실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칠숙의 가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현재까지는 없다. 그러나 흔적은 몇몇 기사로 확인이 가능하다.

진평왕에게는 동륜과 만호 태후 사이에 난 동복 아우가 두명이 있었다.


원년(579) 8월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친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 원년

한명은 백반인 진정갈문왕이고, 백반의 동생인듯한 국반(진안갈문왕) 이다.
그런데 백반과는 다르게 국반(진안갈문왕)은 덕만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진덕(승만)의 아버지가 된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승만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 삼국사기 신라 진덕왕 원년


또한, 삼국유사 선덕왕(덕만)에는 "음갈문왕"를 보면 국반일 수 밖에 없는 "음갈문왕"에 관한 기록이 보여진다.

王之匹飮葛文王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여기서 백반도 "음갈문왕"일 수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면, 국반의 딸인 승만이 덕만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는 것만으로 충분한 반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확실한 증거를  칠숙의 반란 사건으로 증명하고자 하는것이다. 결론 부터 말을 하면 칠숙은 백반갈문왕의 아들일 수 밖에 없다.

진평왕계보도

진평왕때로 돌아가 보자,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러면 다음 대권은 누가 잡을까? 용수와 결혼한 천명이 대권을 잡거나, 신라에 빈번히 보이는 아들이 없을때나 있어도 나이가 어린 왕자를 둔 왕 다음은 사위가 왕이 되었다. 그러니 천명의 남편인 용수나 용춘이 대권을 잡아야 한다. 용춘과 용수는 최소한 용춘은 진평왕시기를 넘어, 덕만이 왕위에 있는 시기를 지나, 647년 진덕(승만)이 왕위를 잇는 그 순간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권은 덕만에게 넘어갔다. 그러니 천명은 정비의 소생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때 왕위계승 서열을 알 수 있는 진흥왕의 자손들의 계보도를 살펴보자. 

 
진평의 딸들은 천명과 덕만과 선화로 알려져 있다. 계보도는 복잡해서 진평/마야의 소생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위의 진평와 계보도에 천명과 덕만이 이복자매로 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진흥왕 계보도


아들이 없는 진평왕 다음의 대권 순위는 누가 될까?

진평의 형제인 백반과 국반이 다음 대권 후보군이다. 그다음은 백반의 자식들이고, 그 다음이 국반의 자식들이다.

그런데 국반갈문왕에게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진평과 마찬가지로 딸인 승만(진덕)만이 있다. 그렇다면, 백반갈문왕의 자식이 왕위승계 제일 순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백반의 자식에 관한 기록은 망실되고 없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칠숙의 반란사건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백반의 아들로 추측되는 이찬 칠숙은 가만히 있으면, 자신이 다음 대권을 잡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진평은 영민하고, 기지가 있는 덕만을 다음 왕위로 세우고자 한다.

또한, 덕만은 공주시절 고모부인 김서현의 딸인 고종사촌 문희와 자신의 언니인 천명의 아들인 이종조카 춘추를 결혼으로 맺어 줌으로,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용춘 세력까지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니 덕만에 왕위가 넘어가는 것을 막을려면, 백반의 아들인 칠숙으로써는 중대한 결단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평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거나, 백반이 살아 있다면, 백반을 왕위에 옹립하려고 반란을 결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쿠데타에 성공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국인(국민)이 전왕이 국정을 농단했다고 선전을 하면 그만이다. 최근까지도 대한민국에서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아주 훌륭한 선례를 남기기도 했었다. 하물며 왕이 하늘인 시대엔 오죽하겠는가? 이래 죽으나 권력욕이 넘치(?)는 칠숙으로써는 당연한 선택이 아닐까한다. 어차피 덕만이 왕위에 오르면, 숙여지내거나 숙청될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칠숙은 반란에 성공하지 못했다. 실패한 쿠데타는 가혹하리 만큼 엄중하게 처벌한다.

이처럼
백반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는 이유는 칠숙이 백반의 아들이며, 반란의 여파로 구족이 멸문지화 당했기 때문이다.

칠숙의 반란사건은 삼국사기에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이면을 추적하다 보면, 왕실내의 왕위다툼이 치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로 김유신의 아비인 김서현의 기록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기사는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 삼국사기 진평왕 51년

입니다. 물론, 김서현의 딸인 문희와 김춘추의 기록을 보면, 대장군보다 높은 소판(3등위)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추증되었거나, 김서현의 기록이 망실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칠숙의 반란 사건이 이상하고, 요상한 이유는 진평왕의 사망에 대한 다른 기록을 보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54년(632) 봄 정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 태종이 조칙을 내려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의(賻儀)로 200단(段)을 주었다.<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정관(貞觀) 6년(632) 임진 정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모두 『정관 5년(631) 신묘에 신라 왕 진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을까?
 - 삼국사기 진평왕 54년

김부식은 우리의 <고기>에는 632년에 죽었다 기록하고 있는데, <신당서>와 <자치통감>을 들어 "631년 신묘에 신라왕 진평이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을까? 왜 신당서와 자치통감이 잘못되었을까?를 반문하고 있습니다.   진평왕 죽음에 이설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덕만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634년 선덕왕 3년에 숙부인 국반갈문왕과 결혼을 하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을 깨는 글을 여러편 기사로 송고했다. 이글을 읽으신 분은 계속 머리를 흔들며 아닌데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하 충분히 그럴수도 있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번 시리즈 글에서 몇가지 소득이 있었다. 일단,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덕여왕시기에 한일 인줄 안 문희와 춘추의 결혼을 선덕여왕이 덕만공주 시기에 한일 임을 증명한 일이나, 덕만이 공주시절 모란꽃이 향기가 없다고한, "모란꽃 사건은 627년 11월에 신라에 들어왔다"는 증명을 한 것이다. 또한, 이번에는 천명과 덕만은 진평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고, 이복자매이라는 증명도 하였다.

사실 통설이란 기존의 학자가 만들어논 다수설이다. 다수설이 되기 위해서는 이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한다해서 모두 진실이 되고,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역사와 대화를 하고, 의문점을 해소해 가는 것이다.

몇편의 글들은 그동안 의문을 품어 왔던 내용을 드라마 선덕여왕을 빌어서 가설을 다시 재정립하여 세우고, 이를 검증하고, 증명하는데 있었다. 또한, 드라마를 통해서 역사를 배우는 과정에 있었다. 글쓴이는 사극이 가져오는 병폐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많이 본다. 잘못된 사극이던, 잘된 사극이던 이를 교본으로 역사를 다시 배울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오히려, 정통사극이나 명품사극을 표방하고, 스스로 당당히 그 시대를 재조명하였다고 선언한 사극이, 실은 잘못된 역사를 왜곡해 사극으로 만들어 질때 역사공부에는 더 좋은 교재가 된다.

사실 사극의 원전에 해당하는 소설이 잘못된 설정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면, 아무리 사극을 잘 만들더라도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역사이야기] - 서녀 천명의 나이 어린 적통 동생 덕만
덕만은 천명의 어린동생임 증명하는 글, 새로 업데이트 된글입니다. 관심있는 분은 본글 추천 후 크릭 ^___^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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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소대영 2009.07.26 2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부탁이 있습니다.알천량이 80세 되던해에 손자를 보게되어 집인에 경사가 났다하여 경사로울 경자로 이름을 개명하였고 이식.간 .상대등 벼슬까지 하셨으며 춘추와 왕위계승에 까지 말이 있어 나는 너무 늙었고 무덕하니 불가하다 자처하고 용맹한 춘추가 왕이되어야 한다고 사양하여 춘추한테 임금자리를 양보하였다고 우리는 알고있습니다.서기577년 생이시고 679년에(수는 110세)졸하셨으며 진주소씨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진평.선덕.춘추에 이르기 까지 왕위 계승이 평탄치 않았는데 그어려운 자리를 나이 불구하고 맡을수도 있었는데 하는 후손으로서 욕심이랄까 있지만 그땐 그럴사정도 있었겠다고 생각하고 알천량이라고 나오고 성이 없는데 그에대해서 후일 진주소씨 시조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상세히 알고쉽습니다 글쓴이 께서 저의 댓글을 보시고 바로 좀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름데로 시조의 흔적을 찾을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蘇城)의 하백(河伯)에 봉해지고 기원전 2266년 소성이 단군 조선에 영속되면서 기시가 소씨로 고쳐졌다. 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촌장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진주소씨(晉州蘇氏) 시조는 소경(蘇慶)이며 소벌도리의 25세손으로 후손이 없었는데 꿈에 소벌도리가 나타나 진주 구시동(九柿洞)으로 이사를 하면 9저를 얻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사를 한 후 660년(무열왕 7)에 9대에 걸쳐 9명의 장군을 낳았고, 이름을 소경으로 고쳤다고 한다. 소경은 648년(진덕여왕 2)에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 후손들이 소벌도리를 원시조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하였으며, 소경을 중시조로 삼았다. - 소씨(蘇氏) - 본관:진주(晉州)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년(647) 정월 17일에 비담(毗曇)을 목베어 죽였는데, 그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 알천(閼川)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 군주로 삼았다.- 진덕왕 원년

      비담이 646년 11월 상대등이 되고 647년 정월 비담이 난을 일으킨후.. 647년에 정월에 비담의 뒤를 이어 상대등에 올랐네요..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곳에 가면 진주소씨 족보를 잘 분석해 놓은 글이 있군요..

      http://hyunk02.egloos.com/1903188

  3. 소대영 2009.07.26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대영 sody06@hanmail.net.으로 글쓴이 께서 앞의 묻는 내용을 혹이라도 알고 계시면 이메일 주소로 좀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4. 2009.07.26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 읽지는못하고가지만,글진짜 잘쓰시는듯..
    >< 칠숙에 관심이 있어서... ㅋㅋㅋㅋ

  5. 궁금궁금 2009.07.26 2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이 작은아버지인 국반과 결혼을 했으면 원래 국반의 부인이자 진덕여왕의 어머니인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은 어떻게 되는건가요?
    걍 쫓겨났을까요?
    월명부인이 안쫓겨났다면 국반은 여왕을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행운아인건가요?
    아니면 여왕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두번째 부인을 들인 간 큰 남자?

    그리고 만약에 월명부인이 첫번째 부인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면, 진덕여왕이 왕이 되었을때 어머니를 월명부인으로 기록했을까요?
    물론 조선시대이기는 하지만 연산군의 어머니는 아들이 왕이 되고 난 다음에도 폐비윤씨로 기록되고 있지 않나요?
    아니면 진덕여왕이 자신의 친어머니인 월명부인을 원래 자리로 돌린건가요? 자신의 전임왕인 선덕여왕을 밀어내고?

    글을 읽어보니 더 궁금증이 생겨서요....

  6.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자리로 돌려 놓지 않았을까요? 저도 글을 쓸때 월명부인은 어찌되었을까 궁금하더군요..
    법률적 어미와, 생물학적 어미와, 법통의 어미 등 차이가 있지 않을까함.

    조선 정조도 큰아버지 아들로 입적하잖아요.. 그리고 왕이되고, 왕이 된후,, 생물학적으로 사도태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지요. .

    신라시대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을 그것으로 추측합니다. 내물왕 이전시기.. 미추왕때 보면 그의 후손들과 실성, 나물 등이 연대가 맞지 않잖아요.. 생물학적으로는.. 이건 그동안 생각햇던 건데.. 밝혀 버렸네요..

    암튼, 계승, 승계, 법통, 등에 의해서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안되는 상황이 해결되거든요.. 기회가 되면 이쪽을 건들생각입니다.. 미추왕때.. 이후를..

  7. 2009.07.26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꿈꾸는 것은 산다는 의미 산다는 것은 꿈을 꾸는 것.

    블로그의 제목과 다른 허구에 빠져 역사(?)를 탐구하는 이질적 행태

  8. 두모 2009.07.31 0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흥미가 많은지라 관심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드리고요.

    위 본문 글 중에 용춘/용수가 진평왕에 뒤이어 왕에 오르지 못한 이유가
    아내인 진평왕의 딸 천명이 정비 소생이 아니기 때문이라 기술되었는데,
    이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제가 어디 다른 글에서 보기에
    용춘/용수의 아비인 진지왕이 황음무도하다 하여 미실 등에 의해서 추방되어 죽었기에
    그 아들들인 용춘/용수는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다고 하더군요.

    성골/진골의 구분이 없는 듯 하다는 글을 쓰셨는데 저도 동의가 됩니다.
    왕족이 있을 뿐이고, 왕의 아들이 계승자가 되지만
    진지왕의 경우와 같이 죄가 있으면 박탈되는 것이 당연하고
    선덕여왕 즉위는 용춘(용수?)의 아들인 김춘추와 군부세력인 김유신이
    결합해서 옹립한 것이라 봐야죠.

    김춘추는 할아버지 진지왕의 패덕에서 벗어나는 시기가 되고
    아버지 용춘(용수?)의 공적과 자신의 공으로
    왕위에 오를 자격이 공인받게 되었다고 봐야죠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9: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충분히 그럴수 있지만.진지왕 폐위사건이 벌어진. 579년에서 632년이면 충분히 지나고도 남았겠지요.. 50년은 안되고.. 654년은 된다는 뜻은.. 글쎄요.. 그때도 안되었음.. 지금도 안되는 거지요..

      그리고 정확히는 후비가 아닌 서자도 아닌..
      정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는데요.. ㅋㅋ

      제가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역사를 비판할때 화랑세기를 인용하지 않는겁니다.. 아직은 화랑세기를 가지고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비판하기는 요원하고, 제 생각은 화랑세기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작품 같거든요..

      너무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절묘하게 절충하고 있어서요..

      후대에 나온 역사서를 절묘하게 빠질수 있다는 말은 후대 작품 아니면 있을수 없거든요..

      성골/진골이 없다는 분을 뵈오니 방갑습니다..

      즐거운 댓글 놀이 였습니다..

      추천도 해주실거죠? ^____^

  9. Favicon of http://lhykkam.naver.com BlogIcon 황금알 2009.07.31 19: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동안선덕여왕을꾸준히보지못해서 이해못하는부분에도움이 되었구앞으로보는재미에 많은도움을 주셔서감사 또감사 좋은 저녁 되세요

  10. 산행인 2009.08.05 1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관심은 많으나 잘모르는 사람입니다. 선덕여왕을 읽고 갓쉰동님의 글을 읽어면서 화랑의 성격에

    의문이 있습니다. 혹시 화랑과 낭도의 성격이 집의 사병이 아닙니까. 화랑은 집의 사병의 우두머리이고요.

    사병이 또 성장하여 사병을 데리고 군에 들어가서 장군이 되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십화랑은

    유력한 열가문의 사병이 아닙니까?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8.05 1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화랑의 다수는 귀족의 자제이고, 그들을 서포트하는 집단은 6부의 귀족이나 일반인들 입니다. 낭두..라고 해서요..

      이 낭두가 가야파에 점령된 적도 있습니다..

      이들은 낭두에서 벗어나면,, 지방의 관리나, 군대에 편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님의 말씀도 틀린것은 아닙니다..

  11. Favicon of https://saeyanbooks.com BlogIcon 도서출판 새얀 2009.08.06 23: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 이번 글도 잘 읽고 갑니다. 읽을 수록 재미가 쏙쏙~~ 사실 칠숙도 선덕여왕의 재밋거리중 하나죠.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12. 글쎄요. 2009.08.13 0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나름 논리정연한것 처럼 보이긴 합니다만

    억지로 끼워맞추기 식 이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어 유감일 따름입니다. 천명과 덕만사이의 맏이와 차녀는 누구인가, 만약 맏이가 천명이라면 왜 차녀인 덕만이 왕권을 계승 했을까에 대해서 아랫글을 보시면..

    진평왕은 진흥왕의 장자였던 동륜태자의 아들로, 동륜태자가 개에게 물려 죽자 숙부인 금륜이 진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진지왕입니다.



    하지만 진지왕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시의 집권측과 갈등이 생겨, 결국 왕이 된지 3년만에 화백회의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에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당시 진지왕에게는 두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용수전군과 용춘전군이 그들입니다.



    용수와 용춘의 존재에 대해서도 두사람이다, 혹은 한사람인데 이름이 잘못 표기된것 뿐이다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진지왕의 장남 용수전군이 진평왕의 맏딸인 천명부인과 결혼하여낳은 아이가 바로 김춘추입니다.



    진평왕은 마야왕후가 죽은 뒤 새 왕비를 들여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이 일찍 죽자,후계에 문제가생겼는데,

    전통대로 왕의 사위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권력을 쥐고 있던 화백회의측이 폐위시킨 진지왕의 아들( 당시엔 용수전군은 죽고 천명은 용춘전군과 재혼한 상태였음)이 왕이 되므로, 화백회의측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고,



    진지왕의 폐위로 왕위에 오른 진평왕또한 이를 용인하기는 곤란했을 겁니다.



    때문에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진평왕이 장녀인 천명을 불러 다음 왕위를 동생인 "덕만에게 양보해 줄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였고, 천명이 이를 "용인"하여 궁을 떠났기때문에

    덕만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게 더 논리적이지 않습니까 ?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8.13 0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다른 글도 읽어보시길.. 님은 화랑세기를 인용하고 계시잖습니까? 이글은 화랑세기를 기준으로 한게 아니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의 기록을 가지고 증명하는 글입니다..

      설마,, 화랑세기를 읽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대부분 드라마 선덕여왕에 관련 포스트를 보시면 화랑세기를 인용하고 있거든요...

  13. Favicon of http://manzzang.tistory.com/ BlogIcon 도희 2009.08.22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읽고가요^^
    댓글을 부끄러워서 잘 안다는 편인데, 재미나게 읽고나니.. 제가 드릴 것은 감사하단 인사 뿐인 것 같아서요^^

  14. 그냥 2009.09.23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고 가네요.. 역사이야기를 좋아라 하는편인데 화랑세기를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네요..1

  15. zzzzz 2009.10.22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걸 지적해야되나 좀 그렇지만 선화는 신라의 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이라고 해요;;;;;;

  16. ㅇㅇ 2009.10.31 0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갑니다 ㅋㅋ 그런데 학생인저로서는 수능과는 1g도 연관되진 않을거같네요 ㅋㅋㅋ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10.31 0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용..ㅋㅋ 아쉽지만, 비교체험 했다고 생각하셈.. 수능에 도움이 되었음 좋았을 걸용.. 역사교육의 한계인데용.. 어쩌겠어용..

  17. Favicon of http://ytrty.tistory.com BlogIcon Nehe 2009.12.04 09: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의 ㅇㅇ 님댓글에 웃음과 안타까운 마음이..... 그나저나 이번 수능에는 신라관련해서문제가 나왔을까요? ㅎㅎㅎ

  18. Favicon of http://www.bestvibramshoes.com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9. Favicon of http://www.bestvibramshoes.com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20. 새벽 2012.12.27 0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계보...진평왕은26대왕이고선덕여왕은27대인데..ㅜㅋ

  21. 윤지 2013.10.31 15: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 칠숙은 백반갈문왕의 서자라 생각됩니다.
    적자 였다면 진평왕이 처음부터 조카인 질숙을 염두해두지 않았을까요?
    아마 성골 남자 후계자가 없으니 조카인 자기에게 황위를 물려줄 것으로 예상했는데, 성골 여자(덕만공주)를 후계자로 세우자 반란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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