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야(주상욱) 월광태자의 장자
9년(522)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그에게 보냈다. - 삼국사기 신라 법흥왕 9년 522년
이 당시 대가야의 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비조부의 누이랑 결혼했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 비조부의 이름이 심상치가 않다. 비조부는 화랑세기에 문노(비조부/문화)의 아버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도 정확히 대가야의 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통설에 의하면 이때의 왕의 이름이 대가야 9대 이뇌왕이라고 한다. 또한, 월광태자가 이뇌왕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만약, 월광태자가 이뇌왕과 비조부의 누이 사이에서 태어났다면 화랑세기 전하는 문노(비조부/문화)와는 사촌간이 된다.
비담(김남길) 580년생
알천(이승효) 577년생
문제는 562년 대가야가 이사부와 사다함에 멸망할 때 마지막 왕은 16대 도설지라고 알려져 있다. 월광태자는 9대 이뇌왕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통설의 절충안이 월광태자가 대가야의 16대 도설지 일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니 도설지가 즉 월광태자가 된다는 뜻이다. 문제는 562년 도설지가 항복하고 낳은 아들이 월야가 된다고 해도 드라마 선덕여왕의 시대적 배경이 610년 전후이니 월야의 나이는 40대 후반이 된다. 그런데 유신과 비슷한 또래이고, 비담(579년생)과 비슷한 또래로 설정했다. 사실, 비담과 알천(577년생)과 비슷한 또래이고, 유신(595년생)만 붕떠 있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잘 봐주어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3번째 아들 무력이 진흥왕의 딸인 아양과 결혼해서 서현을 낳았듯이, 도설지(월광태자)가
유신(엄태웅)595년생
복야회의 장군인 설지의 나이 쯤으로 월야라는 인물을 창조했다면 그나마 이해하고 갈만하지 않을까? 물론, 통설과 다르게 도설지와 월광태자가 다른인물이고, 도설지의 비운의 아들이라면 충분히 월야를 월광태자의 아들로 창조할 수 있다. 사실 태자면 태자고, 왕은 왕인것이다. 그러니 월광태자가 도설지 왕이라고 하는 통설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마 선덕여왕이 모본으로 삼고 있는 화랑세기는 대가야의 복야와 멸망을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까?
화랑세기는 대가야의 멸망을 1차와 2차로 구분하고 있다. 첫번째는 이뇌왕 이전의 대가야가 1차 망하고, 이뇌를 북가야의 왕으로 삼고, 문노의 고모인 즉, 아버지인 비조부의 누이인 양화공주(호조/선혜)를 처로 삼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1차 대가야가 망한 때가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522년 이전에 해당한다. 금관가야가 534년 신라에 복속하기 한참전에 이미 대가야은 망했던 것이다.
8대 풍월주 문노(전호빈) 538년생
- 화랑세기 8세 풍월주 문노
그런데 화랑세기는 문노의 출자에 대해서 이뇌왕의 숙부인 찬실이 이뇌왕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찬실왕은 야국왕의 사위로 문화공주를 낳는다. 이 문화공주가 처음에는 호조와 관계를 하였으나, 문노의 아버지인 비조와 관계하여, 538년 문노를 낳았다고 화랑세기 8세 풍월주(579~582)에 기술하고 있다.
557년 진흥왕 개국7년 국원에서 나갔고, 또 북가야를 쳤다.
문노는 557년 20살의 나이로 반란을 일으킨 국원의 북가야를 쳤다. 이때의 대가야의 국왕은 누구였을까? 찬실이였을까? 아니면 이뇌왕의 아들이라고 알려진 월광이였을까? 아니면 16대 도설지 였을까?
이때의 기록을 삼국사기는 단순히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8년(557) 국원(國原)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사찬 기종(起宗)을 군주로 삼았으며, 신주(新州)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 삼국사기 진흥왕 18년 개국 7년
또 하나 드라마 선덕여왕에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칠성우 중의 일인이며 16대 보종에 이어 풍월주에 오른, 덕만과 같이 칠숙의 난을 평정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염장에 대한 기록이 흥미롭다. 어짜피 덕만이 칠숙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를 오를려면 염장이 등장할 수 밖에 없다. 비담(김남길)이나 춘추(유승호)의 등장보다 염장이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등장할까 자못 궁금해진다.
아버지 천주공은 진흥대제의 아들이다. 그 어머니는 월화궁주(月華宮主)로 가야 이뇌왕(異腦王)의 딸이다. 곧 우리 양화공주(兩花公主)의 딸이다. 진흥의 소비로 들어가 천주공을 낳았다. - 화랑세기 17대 풍월주 염장(586년생)
임종(강지후)호국선도 서현.천주와 비슷한 또래
재밌는 내용은 드라마상 용춘(도이성)과 을제의 수하로 나오는 임종(강지후)은 염장의 아버지인 천주(진흥/월화)를 풍월주에 오르게 하고, 유신의 아버지인 서현을 부제로 하여 화랑을 가야파로 만들려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임종은 용춘과 서현과 비슷한 세대를 살았던 인물이 된다. 아마도 577년생인 알천과 비슷한 나이가 아니였을까?
전설로는 월광사가 월광태자를 기리는 사찰로 알려져 있다. 또한, 550년경 세워진 단양적성비 상에 급간지로 나오며, 561년 창령진흥왕 순수비에는 사척간으로 금석문상에 기록된 동일인물이라고 한다면, 대가야의 마지막 왕 도설지는 562년 이전 진흥왕시기에 신라의 직위를 받는 신하가 된다. 그렇다면, 도설지는 가야의 왕자로 신라에서 숙위나 인질의 성격이 강했을 수 있다.
만약, 화랑세기가 신라 당대의 기록이라면 이뇌왕의 뒤를 522년경 찬실이 왕위를 찬탈하고, 정확히는 대가야 복원이겠민지만, 551년 이전 가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61년~562년 전후에 도설지가 16대 대가야 마지막 왕위에 오른 다음 신라에 대한 독립을 전개하다. 562년 완전히 대가야는 종말을 봤다고 할 수 있다.
562년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이사부에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앞서 달려가 전단문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거기에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진흥왕 23년 562년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은 562년 이전 이미 신라의 속국의 위치에 있었다는 반증이다. 그러니 위서던 아니던 상관없이 화랑세기는 이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찌되었던 월광태자는 522년이전 1차 대가야 멸망시기 8대왕의 아들이 될 수도 있고, 9대 이뇌왕의 아들이 될수도 있고, 10대 찬실의 아들이 될수도 있고, 찬실과 도설지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가실왕의 아들일 수도 있다. 마지막 16대 도설지 왕의 아들도 될 수 있다. 삼국사기와 신동국여지승람과 금석문을 종합해 본다면, 월광은 9대 이뇌왕의 아들로 신라에 귀부해서 살다가, 그의 후손인 도설지가 561년 즈음 해서 대가야 16대 왕위에 올랐다고 보는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일본서기를 보면 기존 통설과는 다르게, 대가야 멸망과 복야운동이 전방위적으로 벌려지고 있고, 삼국사기와 금석문과 일치 하는 기록들이 보인다. 추후 기회가 된다면, 일본서기에는 대가야가 어떻게 복야운동을 벌렸는지 기사로 송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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