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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IN드라마/공주의남자

공주의 남자, 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단종 양위시 경회루 투신사건 사실일까?


<공주의 남자>에서 이개는 김승유에게 작은 복수보다 더 큰 대의를 모의하자는 말을 한다.


수양을 죽이고 반정하여 상왕 단종을 복위시키자는 것이다.


사실 김승유의 복수의 끝은 수양을 죽이는 것이고 김종서의 뜻도 단종을 지키는 일이니 김승유가 하는 일이 대의에 부합한다.


하지만, 이개는 김승유가 하는 일은 복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니 김승유가 이개의 눈에는 민폐였던 모양이다.


어쨌든, 김종서가 죽고, 남은 김종서 당의 일원이라고 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이라고 상소해 사육신들이 계유정난공신이 되었는데 <공주의 남자>에서는 김종서 일파가 되어서 김승유를 감싸고 결국에는 김승유와 함께 단종복위를 시도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김승유는 한성부에서 사육신과 정종을 살리려고 파옥까지 감행한다. 저승에서 김종서가 김승유를 봤다면 혓끝을 찼을 것이다.


사육신이 반정 복위에 실패하고 세조와 죽기전에 설전을 벌리고 고신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도 생육신으로 추앙받는 남효온의 추강집을 채록해서, 세조 선위 과정에 성삼문과 박팽년, 성승의 일이 나오고 있다.


성삼문과 박팽년은 선위를 인정하였지만, 그날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 빠져죽으려 했고, 성삼문이 말렸려서 그만 두고 다음 기회를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서 수 많은 소설에도 등장을 하고 세조와 사육신관련 드라마에서 수없이 인용되는 장면이다. 아마도 처음 이 이야기를 만든 이들은 저작권을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실일까? 그럴듯 하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단지 성삼문과 박팽년을 신격화하고 반정은 세조가 왕위에 오른 때 부터 계획했다는 정당성을 주기위한 만들어진 소설에 불과하다. 진실이라고는 한푼도 없다.
 

○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에, 자기는 덕이 없다고 사양하니, 좌우에 따르는 신하들은 모두 실색하여 감히 한 마디도 내지 못하였다. 성삼문이 그때에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옥새를 안고 목놓아 통곡하니, 세조가 바야흐로 부복하여 겸양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머리를 들어 빤히 쳐다보았다.


이 날 박팽년(朴彭年)이 경회루 못에 임하여 빠져 죽으려 하매, 성삼문이 기어이 말리며 말하기를, “지금 왕위는 비록 옮겨졌으나, 임금께서 아직 상왕으로 계시니, 우리들이 살아 있으니 아직은 일을 도모할 수 있다. 다시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하매, 박팽년이 그 말을 따랐다. 《추강집(秋江集)》



생육신의 하나로 추앙하고 있는 남효온은 <육신전>과 <추강집>을 지었는데 육신전은 조선 선조 시기까지 전해졌으나 어찌 되었는지는 알수 없다. 생육신, 사육신은 남효온의 육신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사육신의 단종복위에 실제로 육신이외 수많은 인물들이 관여를 하였지만, 육신만이 추앙을 추앙을 받고 있고, 추후 사육신에 당시 참여한 인물은 추가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있었고, 현재도 육신의 후손을 자처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선조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사육신 관련해서 세조가 단종으로 선위를 받을 때 성삼문과 박팽년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성삼문은 예방 승지로 옥새를 안조 목놓아 통곡하니 세조가 빤히 쳐다보았다.는 점과 사육신들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추후 세조를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대군일때도 몰아내지 못했는데 왕이 되면 기회조차 없었을 텐데 왜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는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사육신은 세조의 신하가 아니라 단종의 신하이고, 그래서 사육신이 단종복위를 하는건 정당한 권리행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종이 선위를 할 때 신하들이 들고 일어냐 선위를 못하도록 했다면 세조(수양대군)은 강제적인 힘으로 선위를 받아야 했다. 사육신의 다음에 두고보자에 왠지 신뢰가 되지 않는 점이다.


그런데 박팽년과 성삼문의 대화를 보면 이들 대화는 후에 만들어진 이야기임을 쉽게 알수 있다. 왜냐하면 성삼문이 옥새를 가지고 선위하도록 한 주체이다. 그러니 반정을 할때 성삼문에게 정당성을 부여할 필요성이 대두될수 밖에 없다. 옥새를 넘겼지만, 그때 부터 뒤에서 칼을 갈았다고 말이다.

단종의 명이기 때문에 말 잘듣는 신하가 되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면 그전에 성삼문이 단종에게 수없이 간언한 내용은 참으로 우스워지고 만다.


성삼문이 대성통곡으로 옥새를 넘겨주며 반대를 하였지만, 박팽년이 경회루에 빠지려 하자 성삼문이 박팽년에게 다음에도 기회는 있다. 상왕이 살아 있는 동안 후일을 도모할 수가 있다.라고 말을 하니 박팽년이 순한 양이 되어 경회루에 투신 자살 입수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문제점은 1455년 6월 11일(윤)에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공주의 남자>에서 정종과 사육신이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서 단종복위를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정종은 1456년 6월이면 풍진 자신의 목장에서 한가롭게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 정종이 사육신과 만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공주의 남자>의 이야기는 역사화 되어서 사람들에게 회자될 것이다. 어쩌면 추후 정종도 사육신에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렇다면 왜 박팽년과 성삼문은 1455년 6월 11(윤)날에 만날 수가 없었을까?


성삼문은 옥새를 넘기는 경회루 현장에 스스로 옥새를 세조에게 넘기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만, 박팽년은 정종처럼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 둘이 만날수는 없다.


단종 3년 1455년 4월 4일 충청도 관찰사로부터 한 장의 장계가 올라와 충주 목사와 홍주목사가 일을 잘하니 승전함이 마땅하다는 글이다. 이에 대해서 한명은 승천시키고, 한명은 노모 때문에 그대로 충주목사에 있게 한다.
 

“충주 목사(忠州牧使) 김담(金淡)과 홍주 목사(洪州牧使) 조석문(曹錫文)이 치효(治効)가 모두 제일입니다.”

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승천(陞遷)시킨 것이었다. 김담은 노모(老母)가 경상도 영천(榮川)에 있기 때문에 그대로 충주 목사에 임명하였다.



이때 장계를 올린이는 다름 아닌 경복궁 경회루 현장에 있다는 박팽년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서 올린 것이다. 4월 4일이니 6월 11일(윤)에는 올라왔을 수도 있지 않는 것 아닌가? 반문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하지만, 세조 1년 1455년 7월 8일 충청도 관찰사 박팽년 이름으로 올라온 일을 처리한다.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박팽년(朴彭年)이 아뢰기를,

“이제 농사의 일이 바야흐로 많은 시기인데, 수십 일 동안 비가 오지 않으니, 청컨대 향(香)과 축(祝)을 내려서 명산(名山)·대천(大川)에 기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조 1년 1455년 7월 8일


한마디로 단종 3년 1455년 4월 4일 이전부터 1455년 7월 8일 까지 박팽년은 충청도 관찰사로 임무에 충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만약, 박팽년이 6월 11일(윤)에만 특별히 서울 경회루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면 박팽년은 근무지 이탈이 된다.


또 한가지 박팽년 관련해서 박팽년인 세조(수양대군)에게 신(臣)이라 칭하지 않고 비슷한 글자인 거(巨)했다는 박팽년의 문서위조사건이 박팽년은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상왕만을 임금으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예문 제학(藝文提學) 박팽년(朴彭年)이 아뢰기를,
이전(李瑔)504) 의 처는 신의 딸입니다. 신이 충청도 감사(忠淸道監司)가 되었을 때 배소(配所)505) 로 떠났고, 그 뒤에 처가 의 배소(配所)로 돌아가면서 그 어린아이를 신의 집에 부탁한 것이라서 신은 미처 몰랐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여자가 시집을 가게 되면 그 지아비의 집이 으뜸이 되는 법인데, 하물며 그 죄인의 아들을 집에서 기르고 있어 마음이 실로 황공합니다. 청컨대 그 어미에게 돌려주도록 하소서.”
하니, 지하기를,
전(瑔)이 지금은 비록 죄를 입고 있으나, 그 뒤에는 반드시 통할 것이니, 그대로 두고 잘 기르도록 하라.”
하였다.



만약, 1455년 6월 11일(윤)이후 박팽년의 장계에 신(臣)을 사용하지 않고, 거(巨)로 사용했는데 세조가 신(臣)자로 받았다면 중간에 문서를 위조했다는 혐의로 처벌되어야 하지만, 이에 대해서 처벌기록은 없다. 신과 거도 구별못해서 쪽팔려 처벌하지 않았다면 세조가 참으로 배포가 크다는 의미가 되어 흉악하지도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반란이 실패한 후 죽음을 앞두고 세조(수양대군)에게 <나리>라고 놀렸을 가능성은 있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그럴듯한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충청도 관찰사를 한 것은 상왕의 신하로 봉직한 것이지 세조의 신하로 봉직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단종 복위는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세조(수양대군) 왕으로 있더라도 세조가 명한 것을 상왕이 명한 것으로 인정하고 계속 상왕의 신하로 남아 있으면 된다. 박팽년의 말처럼 떠도는 말의 논리적 모순이다.


사육신 신화를 만들 필요성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좀 더 사육신을 극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신화적인 이야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개연성이나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야부리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이야기를 만든 이들은 소설 창작 능력이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거짓말이란 진실은 조금에 뻥은 크게 해야 믿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거짓말 같은 유언비어가 사림(士林)파에 진실이 되어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어서 사육신은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었다.


사림에서 세조(수양대군)이 싫었던 이유는 세조는 유학만을 숭상하지 않았다. 잡기라고 생각되는 불교, 천문, 국방, 지리 기타 등등 잡학이라고 천시하던 학문까지도 세조(수양대군)는 심취해 있었다. 한마디로 실사구시적인 면이 많았다는 뜻이다. 이는 세종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니 유일종교관처럼 유학의 근본이 아닌 일개 한방파가 전부인 것인 냥 믿고 있고, 국가를 통치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고 있었던 사림들은 세조는 이단이었다. 한마디로 세조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정치와 종교가 일치해야하고 유교가 국가통치의 유일한 것이라고 믿은 종교인들인 유학자들에게는 사육신은 순교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중종반정이후 조선은 편협한 유교 통치관을 가지고 있던 세력들이 조선을 움직이는 중추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 천민이나 노비출신들이 관직에 등용되는 예가 있었고, 서얼출신이나 천출 출신이 등용되는 예도 많았다. 더불어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언문)도 널리 보급되어 활발히 사용되었다.


하지만, 중종반정이후 불교와 서얼출신이나 한글(훈민정음)사용은 극히 배타시 하였고 점차 한글은 천민이나 쌍놈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치부되어 음지로 숨어들었다. 서얼 등이 등용된 때는 임진왜란 시기 백성들의 힘이 필요했던 이후에나 가능해지기 시작하다. 인조반정후 또다시 암흑기로 접어들었지만 말이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보고 드라마의 설정이 역사라고 믿는 사람들은 드라마와 역사와 어떻게 다른지 제대로 역사적 진실을 싶다면 다음 아래글들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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