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는 대부분 대한민국 사극의 한계점이다.
처음에 물량공세를 하고 사전제작으로 시청자의 눈을 현혹하지만, 초반 몇편을 제외하면 실시간 시나리오에 생중계 사극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자료조사는 등한시 되고, 제작비의 고갈로 전쟁신은 20명도 안 되는 엑스트라를 동원하거나 후반부로 가면 말로 때우기 일수다.
<
여성 시청자를 끌어들이지 못하는 사극은 시청률에서 고생할 뿐만 아니라 여론을 주도하는 예능이나 드라마에서 이슈화 될 수가 없다.
<
하지만, 대를 이은 사랑은 시청자로 하여금 감정이입에 실패하고 사랑의 합리성이나 개연성 등 동의를 얻는데 실패를 했다.
그렇다고 제작자들이 추구하고자 한 백제의 마지막 충신
그렇다고
<
한마디로 역사적으로 부활시키겠다는 백제의
그렇다면, 시청율을 목적으로 만든
<
의자왕은 서자만 41명인 정자왕
백제의 마지막 황태자 부여융은 연태후의 자식도 아니고 은고의 자식도 아닌 것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지 부여융은 백제가 당나라에 조공한 듣보잡이라고 당당히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최소한 의자왕은 3천궁녀는 아닐지라도 수 많은 비들이 있음을 짐작하고 남는다. 왜냐하면 의자왕에게는 좌평으로 임명된 서자만 41명 이상이 있었다. 좌평에 임명된 서자만 41명이면 어린 왕자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더군다나 이에 딸인 공주들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657년 17년 봄 정월에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각각 식읍(食邑) 을 주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역대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을 가려도 세종대왕과 비교될 만큼 아니 오히려 역대 최고의 정자왕으로 의자왕을 꼽을 만큼 의자왕에게는 넘쳐나는 게 자식들이었다. 오죽하면 허황된 삼천궁녀라는 말이 있었겠는가? 물론, 삼천궁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헛소리다. 백제 수준에서 가질 수 없는 궁녀의 수 이다. 단지 많았겠다는 이야기 수준에서 벗아날 수가 없다.
백제 마지막 비운의 황태자 부여융
그렇지만, 의자왕에게는 서자 41명을 제외하고도 많은 왕자들이 보인다. 정확히 생몰년을 알 수 있는 태자 부여융과 부여효, 부여태, 부여풍(장), 부여용, 부여연 등이다.
더불어 은고는 의자왕의 유일한 왕자는 연태후의 부여태와 은고의 부여효 밖에 없다고 말한다. 연태후와 부여태만 사라진다면 자신이 황후가 되고 부여효가 태자가된다고 연태후를 암살하려다 실패한다.
그런데,
더군다나 좌평도 세작의 끄나풀이라고 잡아들여서 고문하는
삼국사기에는 부여태는 둘째아들로 나오고 부여효는 태자로 나온다. 하지만, 어느새 부여효가 둘째가 되고 부여태는 장자가 되어버렸다.
왕의 둘째 아들 태 (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의 아들 융 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 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 (泰)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정방 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 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태 (泰)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때 왕과 태자 효 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정방 이 왕과 태자 효 (孝), 왕자 태 (泰), 융 (隆), 연 (演) 및 대신(大臣)과 장사(壯士)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삼국사기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義慈挾太子隆走北鄙, 定方圍之. 次子泰自立爲王, 率衆固守, 義慈孫文思曰: 「王·太子固在, 叔乃自王, 若唐兵解去, 如我父子何?」 與左右縋而出, 民皆從之, 泰不能止. 定方令士超堞立幟, 泰開門降, 定方執義慈·隆及小王孝演·酋長五十八人送京師,
신당서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당 나라의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몰아서 성에 들이 닥치니 왕이 [패배를] 면하지 못함을 알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 성충 의 말을 듣지 않아 이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하고 마침내 태자 융 隆 ; (혹은 효(孝)라고 하나 오류이다 ) 과 함께 북쪽 지역으로 달아났다. 소정방 이 도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키니
삼국유사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문제는 백제가 멸망하고 소정방은 정림사지에 대당평제비를 세우고 떠난다. 이때 부여융이 태자로 나오고 있고, 일본서기나 유인원의 비문에도 부여융이 태자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삼국사기의 이야기는 잘못된 전승이라고 하겠다. 신당서에는 부여문사는 부여태의 아들로 부여태가 왕을 참칭하자 우리부자는 어찌될까(如我父子何?)하고 아버지 부여태를 버리고 소정방에 항복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삼국사기에는 태자 부여융이 웅진이 아닌 사비성에 나타날까? 이는 부여 융(隆)과 강(降)이 비슷해서 판각이나 전승과정에서 오류가 생긴것이다.
644년 정월 왕의 아들 융 (隆) 을 태자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어쨌든, 부여태와 부여효가 615년생 부여융보다 비슷한 나이 이거나 많았을 것이다. <
그 왕(王) 부여의자(扶餘義慈) 및 태자(太子) 융(隆) 이외 왕자(王子) (餘)효(孝) 13인은 대수령(大首領) 대좌평(大佐平) 사탁천복(沙吒千福), 국변성(國辯成) 이하 700여 인과 함께 이미 궁궐에 들어가 있다가 모두 사로잡히니
- 소정방 대당평제비 660년 8월
[百濟王 義慈, 그 妻 恩古, 그 아들 隆 등, 그 신하 佐平 千福, 國辨成, 孫登 등 모두 50여 명이 가을 7월 13일에 蘇將軍에게 사로잡혀 唐에 보내졌다
- 일본서기 660년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태자 융이 첫째, 부여태 둘째, 부여효 셋째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부여융은 의자가 왕이 된 4년 후 태자로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지 왕의 아들 융을 태자로 세웠다 하니 장자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부여효가 둘째이고, 부여태가 장자, 부여 융이 삼자일 수가 있다.
실질적인 백제의 마지막왕 부여풍장
하지만, 일본서기에 부여풍장이 631년 무왕 시절에 왜국으로 가고 있음으로 부여풍이 장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하겠다.
드라마 <
백제를 이끌었던 장군들은 의자왕 초기 윤충이었고, 중반에는 <
백제의 오천결사대에는 달솔 계백말고도 상관인 좌평 충상과 달솔 상영 등 고위급만 해도 20여명이 있었고, 이들은 신라에 항복한다. 다만
부여풍(장)만 하더라도 일본서기에 수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3년,631) 3월 庚申 초하루 백제왕 義慈가 왕자 豊章 을 들여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643년 이해 백제 太子 餘豊이 벌통 4개를 가져와 三輪山에 놓아 길렀으나 끝내 번식시키지 못하였다.
650년, 白雉 元年 2월 庚午 초하루 戊寅 穴戶國司 草壁連醜經이 흰 꿩을 바치며, “國造首의 同族 贄가 정월 9일에 麻山에서 잡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것을 百濟君에게 물으니, 백제군이 “後漢明帝 永平 11년(68)에 흰 꿩이 여기저기에 나타났습니다”라고 하였다.
… 중략…
좌우의 대신들은 백관과 百濟君 豊璋·그 아우 塞城· 忠勝 ·高麗의 侍醫 毛治· 新羅의 侍學士 등을 거느리고 中庭에 이르렀다.···
- 일본서기 부여풍(장) 발췌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부여풍은 631년 왜국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643년 부여풍은 태자라 불리웠고 650년에는 백제군이 되었다 661년 백제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이 된다.
삼국시대의 역사기록은 소략하다. 그만큼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할 영역이 많다. 더군다나 역사기록에 부합하게 드라마를 쉽게 만들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등장인물의 생몰년과 몇몇 기록만 일치 시키면 나머지는 작가의 상상력 영역으로 만들수 있을 만큼 삼국시대 사극은 드라마 작가나 제작자에게는 손집고 헤엄치기다.
반면에 <공주의 남자>나, <뿌리깊은 나무>처럼 조선시대 사극은 기록이 풍부해서 좋은 점도 있지만, 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할 공간이 그만큼 줄어들고 작가와 제작자가 공부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만들기 힘든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는 부분까지 기존 기록을 무시하고 소중히 다뤄야할 자료를 폐기까지 하면서 "백제를 재조명"했다는 제작자의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 공염불이 되겠는가?
최소한 지킬 것은 지키는 사극을 보고 싶다. 최소한 <
최소한 역사와 드라마는 구분하고 볼수 있는 안목이 있는 시청자가 되길 소망하며..
2011/11/02 - [역사IN드라마/계백] - 계백, 의자왕 두고 은고 야망 키운 진짜 이유? 당시 당.신라.왜 국제정세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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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가때문에 계백을 보지않습니다.
멋진 사이트 감사합니다
계백을 보면서 얼굴을 찌푸리는 장면중 하나는 연개소문이 직접 계백의 군영을 찾아가는 장면인데요
상식적으로 연개소문은 고구려태왕과 맞먹는 권력자입니다.그린데 백계 장수하나를 찾아가는 일을 어느 역사에도 존재하지 않은일입니다.
내불당 사건으로 세종이 늙어 노망이 들었다고 할
성 시청자를 끌어들이지 못하는 사극은 시청률에서
조카가 시름시름하다 강물에 투신했다는 것이다. 김승유는 그럴 리가 없다고 대문을 두드리
작자들이 추구하고자 한 백제의 마지막 충신 계백을 보여주었나 하면 그렇지도 않다.
발휘할 수 없는 부분까지 기존 기록을 무시하고 소중히 다뤄야할 자료를
나는 확실히 그것의 모든 조금 즐기면서 그리고 당신이 게시물을 블로그 새로운 것들을 알아 보려고 당신 즐겨찾기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작품이다 나는 이와 유사한 것들을 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 가장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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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이란 존호를 올리지만, 이방원은 너무 과한 존호라며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왜 태종은 태상황을 거
생긴것은 세종대왕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말로 세종 이도를 극찬하기도 한다
를 올리지만, 이방원은 너무 과한 존호라며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왜 태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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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가 쇼트 7위에서 프리 1위를 하여 종합 2위를 한것도 대단하다고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