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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고는 의자왕이 자신을 취하려고 자신의 일족인 목씨를 죽였다고 원수를 갚으려고
은고는 연태후를 죽이고 자신의 아들 부여 효를 태자로 세우려 하지만,
은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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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그렇다면 왜 은고는 악녀가 되어야 할까?
은고는 실존인물로 일본서기에만 기록으로 남아 있다. 더군다나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망한 이유를 의자왕에게 찾지 않고, 의자왕의 처 은고에게 원인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
하지만, 삼국사기를 제외한 어떠한 사서에도 백제 마지막 황태자로 부여효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신당서, 삼국유사, 유인원기공비(663년), 소정방대당평제비(660년), 일본서기에 모두 백제의 마지막 태자를 부여융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인원 기공비
삼국사기의 사비(부여) 궁성내에 부여융과 부여문사의 대화는 후대에 잘못 전승된 기록이다. 부여 융이 아닌 의자왕의 수 많은 왕자중에 일인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부여융은 의자왕과 함께 웅진(공주)로 몽진을 떠났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은고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어떤 사람은 “百濟가 스스로 망하였다. 임금의 大夫人이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 무도하여 마음대로 국가의 권력을 빼앗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불렀다.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11월 1일에 將軍 蘇定方 등이 사로잡은 百濟王 이하 太子 隆 등 여러 왕자 13명, 大佐平 沙澤千福·國辨成 이하 37명, 모두 50여 명을 朝堂에 바쳤다.
[百濟王 義慈, 그 妻 恩古, 그 아들 隆 등, 그 신하 佐平 千福, 國辨成, 孫登 등 모두 50여 명이 가을 7월 13일에 蘇將軍에게 사로잡혀 唐에 보내졌다.
일본서기에만 은고가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 무도하여 마음대로 국가의 권력을 빼앗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들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을까? 삼국사기에는 어진신하를 죽인 주체로 의자왕을 지목하고 있지만, 일본서기와 비교해 보면 실질적으로 백제 말년에 왕권을 쥐고 있던 이는 의자왕이 아닌 은고임에 분명해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에도 은고를 은유해서 표현한 부분이 있다. 만약, 그 동안 알고 있던
그런데 유독 백제의 의자왕에게는 해동증자로 추앙하기까지 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멸망한 나라 말왕의 기록은 비참하지만, 의자왕을 비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계백>에서 계백이 의자왕을 찾아가 옛날의 의자왕으로 돌아오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이를 실천한 이는 성충이다. 다시금 드라마 계백은 남의 전공을 계백이 한일로 미화시키고 있다. 사실 계백은 660년 7월 9일 딱 한부분에 등장한 인물로 전쟁에 그리 뛰어난 전공을 세운 전력도 없고, 오천이나 되는 백제의 대군을 운송부대 잡병수준에 불과한 신라군에게 대패를 한 장군이고 단지 백제 마지막을 장식하는 순간의 전쟁에 죽었기 때문에 추앙받는 것이다.
오히려 김부식을 비난하지만, 김부식의 농간에 놀아난 꼴이다. 사실 사대주의나 유교관에 입각한 역사관이 아니더라도 계백은 충신으로 추앙받아야 하지만, 그의 성과에 비해서 과도한 추앙을 받는것 또한 사실이다.
어쨌든 삼국사기에 은고에 대한 기록을 추측할 수가 있다.
16년(656) 봄 3월에 왕은 궁녀(궁인)와 더불어 주색에 빠지고 마음껏 즐기며[淫荒耽樂] 술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좌평 성충(成忠)<혹은 정충(淨忠)이라고도 하였다.>이 극력 간언하자 왕은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는데[瘐死] 죽음에 임하여 글을 올려 말하였다.
17년(657) 봄 정월에 왕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에게 식읍(食邑)을 주었다.
19년(659) 봄 2월에 여러 마리의 여우가 궁궐 안으로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上佐平)의 책상[書案] 위에 앉았다.
여름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
더군다나 소정방의 대당평제비에도 은고가 백제를 치는 명분으로 삼고 있다.
시실 <
어쨌든, 삼국사기에서 656년 좌평 성충이 주색에 빠진 의자왕에게 간언하다가 옥에 갇히고, 옥에서 옥사를 한다. 일본서기는 이 사건 이후 더 이상 어진 신하들이 나설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삼국사기에는 여러 마리 여우가 궁궐 안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가 상좌평의 책상 위에 앉았다. 기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태자궁 (부여 융)의 궁에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며 은유적으로 여인들이 백제를 좌지우지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림사지 소정방 대당평제비
여인들이 백제의 국정을 농단한 또 다른 증거는 657년 정월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한 것으로 봐서도 쉬이 짐작이 된다. 그 동안 이 기술은 왕권강화정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꼭 왕권강화책으로 보기에는 이전 의자왕이 궁인들과 놀아나고,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고, 여러 여우들이 궁궐에 침입했다는 기사나 흰여우(白狐)가 상좌평이 해야 할 업무장소인 책상 위에 있었다는 기사를 보면 특히 흰 여우로 상징되는 늙은 은고(恩古)가 국정을 장악했다고 할 수가 있다.
측천무후 |
황극,제명 동일인물 |
선덕여왕 |
삼국사기, 일본서기, 소정방의 대당평제비 등의 사료를 검토한 결과 은고에게 백제 멸망 책임 일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백제는 은고가 당나라는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측천무후로 인해서 전당은 망한다. 백제가 망한 이유를 은고에서 찾는것과 별반다르지도 않다.
은고가 백제의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나라의 측천무후(654년~이후)를 롤모델로 했거나, 신라의 선덕여왕(632~647년), 진덕여왕(647~654년)을 롤모델로 했을 수도 있다. 더불어 백제 멸망시 왜에는 (황극642~645,제명: 655~661)이 여왕으로 있었다. 어쩌면 은고는 여왕이 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당시 동아시아(신라, 당, 왜)는 여인천하였으니 말이다.
<계백>에서 개연성 없는 계백, 은고, 의자왕의 삼관관계보다는 좀더 스케일 있게 은고가 백제를 집어삼키려한 이유를 주변국의 여인들에서 찾는게 더 개연성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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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644년 의자왕 4년 태자가 되는 이는 부여융이고, 백제가 멸망한 660년 7월에 태자도 부여융이기 때문이다. 역사란 교차검증을 해야 하는데 부여 효가 태자였다는 기록은 단지 삼국사기 한곳에만 있기 때문이다.
현재남아 있는 삼국사(삼국사기)는 1145년(인종23년) 삼국사기의 초본이 아닌 그로부터 400년이 흐른 후 1512년 정덕본이나 1537년 옥산서고본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덕본을 만들 때 삼국사의 많은 부분이 망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마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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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
일본서기에는 당으로 끌려간 왕자들만 해도 태자 부여융을 비롯한 13명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백제본기나 신당서에도 사비에 웅거한 부여태를 둘째 왕자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니 드라마 <
더군다나 부여태나 부여효는 나이가 부여융과 별차이가 없다. 그런데 <계백>에서는 삼각관계 때문에 부여태나 부여효가 의자왕이 태자가 된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그리고 있다. 최소한 극중 시제인 643년 가을경이면 이들은 최소한 18세 전후가 되어야 한다.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는 곳에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드라마가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쨌든, 은고는 백제가 망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당시의 백제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증명되었다. <
위에서 언급했지만, 좀더 스케일 있게 여인으로 왕을 꿈꾼 은고가 당시 여인천하였던 동아시아 질서에 편입하는 것이 아닐까? 조잔하게 개연성 없는 삼각관계가 왠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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