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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IN드라마/뿌리깊은나무

뿌리깊은 나무, 밀본 집현전 철폐? 집현전은 세종 친위조직아닌 성리학 뿌리 밀본이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이신적은 주자소로부터 활자 틀(거푸집) 하나를 얻어 밀본 본원 정기준에게 전한다.

 

정기준은 그 동안 집현전 학사를 죽이면서 모아둔 증거를 바탕으로 세종 이도가 하려는 비밀 프로젝트가 글을 만들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정기준은 밀본 조직을 통해서 세종 이도가 오랑캐가 되려 한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중화를 버릴 수 없다고 유림을 꼬득인다. 정기준의 목적은 세종 이도의 논리적 바탕을 제공한 집현전의 폐쇄다.

 

조선 초기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충분히 반대했을 것이 자명하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스스로 유교의 종주로 생각하는 기자의 후손이라는 의식이 강했고, 중국이 청나라로 교체될 때는 진정한 유교의 뿌리 성리학은 조선에 있지 중국에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뿌리깊은 나무에서 이신적이 주자소로부터 얻은 글자 거푸집을 보면 이상한 면이 있다.

 

뿌리깊은 나무는 고증이 철저하기로 이전 사극과는 차별화 되어 있지만, 뿌리깊은 나무에서 점점 고증보다는 오류가 서서히 들어나고 있다.  그동안 뿌리깊은 나무는 사전제작에 가까웠지만, 지금부터 방송되는 회차는 생방송에 가까운 드라마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정기준은 거푸집에 쓰여진 문자를 써서 보여준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누구나 알수 있는 문자이다. 이라는 모양을 180도 회전한 꺼꾸로 해 놓은 "른"이기 때문이다.

 

곤구망기와 유사한 트릭이다. ()()()()라고 하지 않고, ()()() ()으로 배열을 했다면 시청자의 다수는 곤구망기가 밀본의 미완성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정기준이 집현전 폐쇄하려는 목적은 집현전이 세종 이도가 하려는 정치의 논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집현전은 정기준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정확히는 뿌리깊은 나무 작가 김영현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집현전은 세종 이도의 정치적인 논리를 제공하는 목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집현전은 왕의 딴지맨의 역할이 더 강했다.

 

그러니 정기준이 필요한 신하들의 나라, 정승의 나라는 집현전이 없으면 실현이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정도전이 생각하는 정치를 하려면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조직이 집현전이다. 논리를 제공하고, 논리를 바탕으로 저술활동을 하는 곳이 집현전이기 때문이다. 정기준의 밀본이 곧 집현전이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정기준은 세종 이도가 성리학을 없애려한다는 예로 궁궐안에 만든 불당 (내불당) 사건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세종 이도는 내불당을 만든것은 사실이지만, 정기준이 말한 시기와는 다르다. 세종 이도가 내불당을 만든 때는 소현왕후가 죽고난 1447년 이었다. 뿌리깊은 나무 시제는 1443년 12월 30일 언문(소리글) 훈민정음이 창제된 7일 전의 일을 미스테리하게 극화한 것이다. 그러니 미래가 과거를 재단할 수는 없다.

내불당이 만들어질 때 가장 많은 반대를 한 집단은 다름아닌 집현전이였다. 더군다나 유생들인 성균관 까지 보이코트를 하였다. 훈민정음 반대도 집현전이 주동이 되었다. 내불당은 세종 이도를 망령되었다고 할만큼 조선 유림사이에서는 없애야 할 주적은 훈민정음에 관련된 정음청과, 언문청과 내불당 이였다.

세종은 즉위후 내불당을 없앤다. 그래서 유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세종 15 1433 1월 30 문소전(文昭殿)불당(佛堂)을 걷어 없애기를 명하고, 그 불상(佛傷)과 잡물(雜物)흥천사(興天寺)에 옮기게 하였다.

 

하지만, 세종 17 1435년 태조가 정릉 옆에 만들었던 흥천사 사리탑을 중수하고 경찬회를 개최하려고 하지만, 유림들의 반대에 직면한다. 세종이 흥천사 사리탑 경찬회를 열려고 한 때는 세종 22 1440년부터 였다. 하지만, 끊임없이 사간원, 사헌부, 집현전, 성균관 등으로부터 상소를 받아 반대에 직면한다.
반대에는 김종서, 정인지, 황희, 최만리, 박중림(박팽년의 아버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세종은 끊임없는 상소에 승정원으로 하여금 경찬회 관련 상소는 절대 받지 말라고 명한다. 한마디로 언로가 차단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세종은 경찬회를 성삼문의 할아버지 성달생에게 맡기고 있다. 세종은 반대에 직면하자 하나의 꼼수를 내는데 세종 자신이 서울에 있지 않고, 행궁을 떠날 때 흥천사 사리각 경찬회를 한다면 상소를 할 수도 없고, 반대도 없지 않겠느냐는 계책을 내세운다.

 

결국 세종은 온정을 떠난 상태에서 세종 24 1442 3월 24 흥천사 사리각 경찬회가 개최된다. 이때 모인 중만 전국에서 1 8백명이 넘었다.

 

이 모임의 이름은 백팔공승(百八供僧)이라 하였으나, 승도(僧徒)들이 사방에서 모여서 공양한 중이 1 8 18명이고 속인(俗人) 3 87명이나 되어 그 비용이 적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리각(舍利閣) 담장 밖에는 부녀들이 늘어서서 밤낮으로 먼저 보려고 다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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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넘게 질질 끌다 사리탑 경찬회가 열린 것이다. 만약, <뿌리깊은 나무>에서 성리학을 버리고 불교를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냐는 증거로 <내불당>이 아닌 흥천사 경찬회를 예로 들어야 합리적이다.

 

더군다나 세종 15년 내불당을 없애고, 불상과 잡물을 흥천사로 보내고 난 후 였다. 세종 30 1448 7월 17내불당을 문소전 서북쪽 궁궐에 만든 때는  "문소전 서북에 불당을 설치할 것을 명하자 이사철·이의홉 등이 불가함을 아뢰다"

이때 내불당을 만들자 흥천사 경찬회 때와 같이 수 없는 반대에 직면한다. 내불당 사건으로 세종은 후일
늙어서 망년이 들었다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집현전을 없애야할 주적으로 설정한 밀본의 정기준은 자신들의 뿌리가 되어준 집현전을 없애려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다. 집현전은 왕에게는 계륵과 같은 필요악이였고 신하들인 유학자들에게는 없애면 안되는 성리학의 총 본산과도 같은 조직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