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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쉰동 꿈꾸는 삶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의 비밀 조직인 천지회에서 언문(소리글) 훈민정음이 창제 된다.

 

밀본은 세종 이도가 하려는 일이 글을 만드는 일인지를 알게 되지만, 글이 어떠한 형식인지 모른다.

 

하지만, 글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밀본과 유림은 글을 만들어 스스로 이적이 되려하느냐고 반발한다.

 

유림의 영수인 혜강을 필두로 성균관 집현전, 사관들 까지 들고 일어난다.

 

문제는 세종 이도가 만들려는 글이 얼마나 좋은지, 나쁜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강채윤은 훈민정음 28자로 반나절만에 글을 읽고 쓴다. 북촌의 어리숙한 밀본의 자객은 자신의 반나절 만에 자신의 이름를 쓰고, 어린 아이는 밀본 정기준의 말을 바로 듣고 글로 써내려 간다.

 

밀본 정기준은 글은 지배자와 지배하지 않는자를 가르는 기준인데 모든 백성들이 글을 알게 된다면 자신들과 백성들과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며 집현전 철폐를 내세워 글(훈민정음)과 세종 이도의 친위세력 집현전과 바꾸려 한다.

 

하지만, 세종이 만들려는 글이 하루만에 배우고 익혀서 말한다면 집현전 철폐가 아닌 한글을 만들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뿌리깊은 나무>에서의 훈민정음 보급을 위해 정음청과 언문청을 만들고 친위세력 집현전 철폐를 맞바꾼다는 설정은 그럴 듯 하다.

 

하지만, 이는 역사와는 1인치도 비슷한 부분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언문  훈민정음이 창제되자 집현전을 비롯한 성리학의 양반들이 반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시로 최만리의 상소를 들기도 한다. 이는 단순한 소설상의 설정일 뿐이다. 소설이 얼마나 역사를 망칠수 있는가의 대표적인 사례가 훈민정음 한글에 관한 최만리의 상소와 당대의 시대상을 모르는 단순한 생각이 지금까지 사실처럼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때는 144312 30로 명절인 설을 앞둔 날이다.

 

세종 이도가 훈민정음을 발표한 때가 참으로 교묘하지 않는가? 세종 이도는 집현전이나 사관이나 사간원이나 유림들이 반대할 것을 예측하고 공개를 하였을 것이다. 단지 설을 앞두고 발표를 하므로서 반대를 교묘히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시 유림들은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는다.

 

1444 2월 세종 이도는 중국의 한자를 우리의 훈과 음으로 되어 있던 운회를 언문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한다.

 

그 중심에 세자(문종)가 있었고, 세조 수양대군(진영대군)과 안평대군 등이 중심이 되어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을 동원하여 작업하게 한다.

 

또한, 삼강행실도를 언문 훈민정음으로 새롭게 만들어 보급하게 한다. 정음청, 언문청을 만들고 과거에 언문 훈민정음을 과목에 채택한다. 더군다나 소학, 사서, 삼경을 비롯한 수 없이 많은 유학의 저서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케 한다.



그런데 집현전 대빵인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해서 하위지, 김문 등 7명이 반대를 한다. 하지만, <뿌리깊은 나무>에서 천하 제일검객과 같은 논쟁의 달인 세종 이도는 최만리와 반대자의 논리를 무력하 시키고 김문을 하옥하고 장 100대를 치는 것으로 언문 반대 세력을 진압한다. 김문에게 죄를 준 것은 임금을 상대로 거짓된 말로 속임수를 썼다는 것이지 언문 자체는 아니였다.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조사하여 아뢰기를,
김문(金汶)은 율(律)이 대제상서사불이실(對制上書詐不以實)에 해당하오니, 장(杖) 1백 대에 도(徒) 3년을 처하소서.”
하니, 다만 장(杖) 1백 대를 속(贖)바치게 하였다.
1444년 2월 21일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가 논쟁의 달인으로 나온 것은 사실이다. 세종 이도는 성리학의 논리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한과 협박, 눈물 등 다양한 인간적인 면모를 동원하여 반대를 회유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근접한 사람이 김대중노무현이다.

 

특히 노무현은 논쟁을 좋아하고 자신을 논리로써 굴복시킬 수 있다면 언제든지 자신의 견해를 바꿀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그리고 집권초기 검찰개혁을 하면서 평검사들과 집단토론을 주재한 적도 있다. 조중동을 비롯한 신문들은 논쟁에 집중하기 보다는 세종 이도가 지랄하고 자빠졌네, 우라질 처럼 말하는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끼고 있었던 시청자들과는 다르게 막 하자는 거냐?노무현의 말에 딴지를 걸어서 논쟁은 사리지고 노무현의 막말사건으로 비화시켰지만 말이다.

 

세종 이도가 언문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운회와 삼강행실도를 만들라 하자 처음 김문을 비롯한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그런데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반대를 하자 김문은 자신의 견해를 바꿔 최만리의 편에 섰고, 어찌 선비가 교언영색할 수 있는가 왕을 속이는 김문을 하옥하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집현전 학사는 처벌하지 않는다.

 

최만리가 반대한 이유는 중화와 다른 글을 만들어 이적이 되려하는가 였고, 글은 배우고 익히는데 시간이 오래 결려야 하는데 언문은 너무 쉬어서 유자들이 공부를 게을리 할까 저어한다고 한것이다. 훈민정음은 너무나 훌륭한 글이라는데 최만리도 동의를 하였었다.


 

 

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중략..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1444년 2월 20일 최만리 언문 반대 상소


<뿌리깊은 나무>에서 모든 관청이 업무를 보지 않고, 등처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 언문 훈민정음을 가장 반겼던 사람들은 실제 유림들이었다.

 

함길도, 제주, 호남, 경상, 경기마다. 말이 다르듯이 한자도 한자를 공부하는데 스승에 따라 훈과 읽는 방법이 달랐다.

 

이를 통일하고 스승이 없어도 한자를 읽게 만들어 버린 것이 언문 훈민정음이다. 한자는 스승이 없다면 배우고 익힐수가 없는 문자였다. 하지만,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한자는 혁명과도 같았다. 혼자 익힐 수 있는 문자가 된것이다. 훈민정음은 양반 유림들에게는 한자를 공부하기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글이 되었다. 한마디로 문자(한문)을 배우는 보조수단으로 한글(훈민정음)만한 것이 없었다.

세종 이도가 가장 먼저 한일도 한자사전 운회를 언문으로 만들어 조선에서 사용하는 한자음을 통일화 시키는 작업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는 환영분위기 였다. 훈민정음에 반대는 집현전의 최만리와 7명의 유학자뿐이였고, 오히려 내불당이나 흥천사 사리탑의 경우는 몇 해를 넘기고 끊임없이 상소를 하고 모든 유림들이 들고 일어나 데모와 사보타지를 하였다.

후에 문종이 즉위하자 정음청을 없애고, 단종이 즉위하자 언문청을 없애자는 상소를 하고 유림이 정권을 장악한 중종반정 이후에 언문청을 없애버리지만 말이다. 이는 정보의 과점상태가 사라지고 꼴보수 성리학자들인 사림파와  백성을 가르는 점이 없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했지만, 말이다.

사실 훈민정음을 지킨 이는 세종 다음에 세조 수양대군이였다. 수양대군이 없었다면 훈민정음은 한 때 과거에 있었던 흘러간 글자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세종이도에게 왕으로서 집현전은 계륵과 같은 존재였지만, 유학자인 세종 이도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조직이었고, 집현전은 유학을 숭상하는 성리학자의 연구기관으로서 유학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논리를 개발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집현전은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의 친위조직이 아닌 집현전을 없애고 성리학의 나라를 만들려한 밀본의 뿌리에 해당하는 것이다. 문제는 <뿌리깊은 나무>에서 단순하게 집현전 세종의 친위조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목적이 있는 기구로 설정하고 밀본은 집현전만 없으면 재상이 다스리는 성리학의 나라가 된다는 엉뚱한 설정인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를 하면 세종이 언문을 만들자 극히 일부의 반대가 있었지만 별다른 반발이 없었다. 왜냐 하면 언문 훈민정음은 백성이 아닌 유학자 자신들에게 너무나 필요한 문자였기 때문이다. 유림의 힘은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부에 있었다. 그리고 공부를 통한 정보의 독점에 있었지 문자를 알고 말고의 차이가 아니였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대다수가 한글을 읽고 쓰지만, 공부를 통해서 정보를 독점한 극히 일부에 이끌려가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백성은 신분상의 제약으로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글을 안다고 해서 입신양명을 할 수 없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강채윤이 밀본을 색출하여 일을 마무리 하면 세종 이도에게 할말이 있다고 있다고 한 것은 단순히 소이를 취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양반과 천민을 가르는 신분제를 없애야 한다는 소원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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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개울 넘어에 2011.11.29 0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왕조시대의 왕은 절대자입니다. 왕의 정치행위,행동들에 신하들이 반대하는 건 왕이 용납할 정도에서 그치는거지 그 이상의 반대행위는 여차하면 3족이 몰살당할 위험을 감수할 자신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거죠.
    왕조시대의 법전(조선의 경국대전 같은)은 헌법개념의 상위법이 아니라 일반법이라 특별법 개념의 왕의 교시에 밀리는 겁니다.
    왕의 교시는 법보다 우선인거죠.
    괜히 환관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수렴청정하의 왕의 친인척이 국정을 유린하는게 아니죠.
    지금과 비교해서 왕조시대 왕들은 군,병권을 포함한 행정에 입법,사법에 언론 까지 장악하고 있는건데 뿌나같이 왕권이 허약해 보이는건 너무 심한 오버로 보입니다.
    유신시대 박정희나 5공 초 전두환과도 비교할 수 없이 터무니 없이 강한 권력을 가진게 왕들인데 뿌나같이 왕권이 허약했다면 조선이 저리 오래 갈 수가 없는거에요.
    신하들이 상소하고 간언하는게 사실은 왕이 이정도는 봐줄거란 간보기가 전제되 있다는 말이죠.

  3. 붉은비 2011.11.29 1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이나 드라마에서와 같은 극렬한 반대는 판타지가 섞여있음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한글창제가 환영받았다고 하기에는 세종 사후의 분위기가 영 그렇죠...^^;
    뭐 중종반정 이후 왕조 초기의 활력을 잃고 복고로 회귀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죠만...

  4. 2011.12.01 0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감감가마

  5. 세종대왕 2011.12.01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나가다가 한마디 적어봅니다... 도대체 한글을 유림이 반대하지 않았던 근거를 어디서 두었나요?? 실록이나 권위있는 근거를 두고 말을 해주세요... 유림이 한자를 익히기위해서 좋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유림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한자를 익히는게 좋아 한글을 반대하지않았다는 말도 억측같네요... 한글에 대해서 반대하지 못한 것은 반대를 할 명분이 없었지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실력이 없던겁니다. 당대 최고의 언문학자가 바로 세종이지요.. 최만리 등 성리학적인 내용만 들어 반대를 했지 다른 언어에 대한 내용에 반대를 못하고 논리적으로 이기지도 못한것이지요... 또한 사대부들이 반대하지 않았다고 확신은 못하지만 그러한 내용이 없던것은 한글에 대한 무시가 더 큰듯합니다... 왜냐하면 한글은 이후로도 거의 쓰이지 못하고 부녀자들이나 익히는 것으로 전락했기 때문이지요

  6. 세종대왕 2011.12.01 0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울넘어님~~~ 조선의 왕이 절대권력을 가진 것은 몇왕밖에 되지 않아요..... 전 연산군만이 왕다운 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이며 명분의 나라이지요.... 왕이 아무리 신하들보다 더한 권력을 가진 분이라고 하지만 명분 없이면 어떠한 것도 반대의 부딪히고 말지요...... 세종이 너무 유약하게 그려진다고 했지만 전 사실에 가깝다고 봅니다...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지요... 이유가 병때문에 그런건지는 확실히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세종은 왕권과 신권이 가장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시대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절대권력을 내세워서 신권을 누르지는 않았고 논리(경연..)로써 조화를 이루신게 맞습니다.

  7. 헐.. 2011.12.03 12: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제가 모르는 근거가 있었던가하고 읽어보았는데,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한국사학과 교수님 수업을 들을 때 배웠던 바로는 매우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었고, 반포가 된 후에도 양반들이 여전히 싫어하고 멸시해서 몇백년동안 제대로 대우도 못받았고 그저 뒤에서 양반 여인들이나 소설책 읽고 편지쓰는 용도로 조금 쓰이다가 시간이 더 지난후에야 평민들이 소설책보고 하는데 쓰이게 되었다고 배웠습니다. 한글반포도 굉장히 기습적으로 떡! 이루어졌었고.. 반포후에도 반대가 엄청났었고.. 따라서 여전히 한글창제를 언제부터 누가 함께했는지, 아니면 진짜 세종혼자 몰래 했던 것인지도 미궁이라고 배웠습니다만.. 어쨰서 환영받았다는 주장을 하시는것인지..

  8. ㅇㅇㅇㅇ 2011.12.07 0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조선왕조실록에다가 '언문'으로 검색을 해 보니까 반대 사례라고는 최만리 등 몇 명의 상소 사건 단 한 건 뿐이더군요. 뇌물 사건으로 사형위기에 처한 조말생을 세종이 어거지로 구해 낸 사건이나 내불당, 흥천사 법회 등의 사건에 수년동안 수백건의 상소가 올라오고 대신과 언관들이 등청을 거부하고 오만 난리를 쳐 댔던 거에 비하면 이건 뭐, 사실상 반대가 거의 없었다고 봐야죠. 대왕세종이나 뿌리깊은 나무 같은 환타지 소설로 역사를 "공부"하시는 분들이 가끔 여기다 댓글을 다는데 참 안쓰럽군요. 심지어 1월 1일이 어떻게 설이냐는 초딩까지 댓글을 달고 있으니...

  9. "언문" 2011.12.09 1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글쓴이가 어떤 의도로 이런 글을 쓰신지는 모르나..
    "언문"이 뭔지는 알고..
    언문(소리글)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쉽게.. 검색창에 "언문"이 무슨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는 한번 확인해보셔요..
    ㅋㅋ
    "언문"이 어쩌고,,,
    그것만 보더라도 조신시대에 양반들이 한글을 얼마나 낮추어 생각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0. Favicon of http://www.balloonking.co.uk BlogIcon balloons by post 2011.12.11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것은 아주 유익하고 좋은 포스트이다. 나는 당신이 화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좋아한다. 나는 진짜로 그것을 읽는 즐겼다. 많게 감사합니다.

  11. Favicon of http://www.toeshoesvibram.com BlogIcon vibram five fingers sale 2012.06.05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제 훈민정음 해례(교본)은 세자(문종), 수양대군(세조),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등이 세종의 지시와 교정을 받고 만들어진다

  12. Favicon of http://www.bestvibramshoes.com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sale 2012.06.08 1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리글)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쉽게.. 검색창에 "언문"이 무슨

  13. Favicon of http://rocville.com/?p=Events BlogIcon Harvilchuck 2012.07.08 2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의 훈민정음 보급을 위해 정음청과 언문청을 만들고 친위세력 집현전 철

  14. Favicon of http://www.balloonking.co.uk/40th-birthday-balloons-2 BlogIcon 40th birthday balloons 2012.07.14 0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너무 귀엽습니다 ^^
    잘보고 갑니다

  15. Favicon of http://pornhublive.com/ BlogIcon http://pornhublive.com/ 2012.07.19 2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지만, 세종이 만들려는 글이 하루만에 배우고 익혀서 말한다면 집현전 철폐가 아닌 한글을 만들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16. Favicon of http://cheapcarinsurancemichigan.com/ BlogIcon cheap car insurance michigan 2012.07.23 2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종이 만들려는 글이 하루만에 배우고 익혀서 말한다면 집현전 철폐가 아닌 한글을 만들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17. Favicon of http://www.amerisleep.com BlogIcon Tempurpedic 2012.07.28 2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주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 쇼트프로그램은 기대치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8. Favicon of http://www.affordable--health-insurance.org/arizona-health-insurance/ BlogIcon affordable health insurance in arizona 2012.08.09 04: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좋은 기사를 게시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새로운 것들을 게시 보관.

  19. Favicon of http://www.servantsound.com/2012/04/best-medical-kits-only-high-quality-will-do/ BlogIcon freeze drying 2012.12.10 1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드라마 작가가 간과한 것이 있다. 태자 부여 융에 관한 것이다. 부여융은 615년에 태어나 682년 68세의 나이로 복망산에 뭍힌다.

  20. Favicon of http://extravirgin-oliveoil.net BlogIcon extra virgin olive oil 2012.12.17 0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게 한글을 만드는 세종역을 했는데 한국말 맞춤법이 틀린 차칸남자가 되었느냐고 송중기에게 차칸남자를 바로 고치라고 한다.

  21. Favicon of http://extravirgin-oliveoil.net BlogIcon extra virgin olive oil 2012.12.17 0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게 한글을 만드는 세종역을 했는데 한국말 맞춤법이 틀린 차칸남자가 되었느냐고 송중기에게 차칸남자를 바로 고치라고 한다.


삼국사기는 덕만을 진평왕의 장녀이며, 마야부인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거나 이설이 있음을 곧잘 지적하던 일연은 진평왕의 장녀이며, 마야부인의 딸이라는데 이의제기하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의 무서움은 기존 사서의 빈틈을 칼처럼 파고 들고 있다. 그동안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거나, 또는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한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선덕여왕이 덕만에 관한 기록에서도 화랑세기의 위력은 발휘된다.

그런데 뜸금없이 화랑세기는 무슨 소리, 덕만은 진평왕의 딸인것은 분명하고, 마야부인의 딸인것은 맞지만, 천명이 맏이고, 덕만은 천명의 동생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도 덕만이 천명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는 무엇을 근거로 덕만이 천명의 동생이라고 했을까? 그건 화랑세기에 맡기도록 하자. 언젠가는 화랑세기를 심층 분석할 때가 올것이다.


사실 덕만의 기록을 심층분석하고 있는 이유도 현존 화랑세기의 진위논쟁에 뛰어들려는 의도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
 
글쓴이는 그동안 덕만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 태어났지만, 천명은 마야의 소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더나아가 덕만이 기존에 알고 있던 늙었을때 왕위에 오르지 않고, 극히 젊은 나이때 즉위했다는  여러 증거를 제시하고, 이를 증명하였다.

또하나, 덕만과 천명이 다른 출자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이전글에서 흘렸다.

덕만이 가지고 있는 남성스런 이름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신라 당시에도 여성은 여성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덕만의 어미인, 마야, 진평의 어미인 만호(이것도 약간의 중성을 넘어 남성성이 보이긴한다.) 지소, 지조, 선혜왕후, 보희,문희 등 그 나름대로 여성성이 보이지만, 뜸금없이 덕만이라니, 덕만이 가지고, 있는 뜻은 결코 나쁜 뜻은 아니다. 덕을 널리 퍼트리고 길게 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전 글 [역사이야기] - 천명이 말한 덕만의 촌(?)스런 이름의 이유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덕만의 이름이 가지는 남성성

덕만이 천명의 나이어린 이복동생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는데, 진평왕이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 집에서는 여자 아이의 이름에 남자의 이름을 붙혀 다음 출생자가 남자이길 소망하는 이름을 짓기고 한다. 또한, 여자이름 중에 끝순이, '말희', '끝네', '말자'라는 이름은 대부분 아이를 더 이상 낳지 말자는 뜻도 있지만, 여자 아이는 그만 낳자란 뜻을 포함하고, 삼신할미에게 다음은 아들을 점지해달라는 기원이기도 하다.

이름에서도 덕만은 위로 많은 언니들을 두었음직하지 않는가? 덕이 있으라는 뜻도 되겠지만, 태어나자 마자, 왕실에 아들들로 번창할 덕을 빌었음 직한 이름이니 말이다.

 
만약, 덕만이 천명보다 언니라면 진평왕의 첫번째 공주의 이름을 '덕만'이란 남성의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여쁜 공주의 이름에 덕만이라니, 다음에 왕자를 생산을 염원하기 위해서 '덕만'이라고 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만만의 콩떡이 된다. 진평은 왕이다. 언제든지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진평왕 초년에 덕만의 이름을 지었다면 진평왕의 머리가 좀 이상스러운 것이다.

 
덕만의 이름은 진평왕과 왕실의 절실한 적통을 이을 왕자를 바라는 이름이다. 또한, 마야도 제일 왕후는 아닌 것이다.  

덕만과 천명이 이복자매라는 또 다른 증거 (세종과 그의 형 경녕군)

또하나,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조선시대 세종에 관한 기록이다. 세종을 우리는 이방원의 3번째 아들로 알고 있다. 그리고 세종이 즉위하게된 배경도 너무나 잘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과연 세종은 태종의 3번째 아들일까? 아니라고 한다면 총맞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태종(이방원)의 3번째 아들이 아니다.


일단, 세종(이도)을 태종(이방원)의 3째아들로 기록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즉위 초년 세종이 세계를 기록한 내용을 살펴 보자.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의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세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 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다. - 조선왕조 실록 세종


이기록만 있다면, 세종은 태종의 3째 아들 같지 않는가? 그리고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녕군의 휘는 비(裶)이고 자는 정숙(正叔),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1395년(태조 4) 12월 13일 개성의 정안군(후의 태종)의 사저에서 효빈 김씨의 소생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관후하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 전주이씨 대동종보 경녕군

드라마 대왕세종을 본 사람은 이방원의 또다른 아들 경녕군이란 이름을 들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태종의 아들이고, 후비 효빈 김씨 소생이다. 그런데 경녕군은 1397년생 세종(이도)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니 경녕군은 세종보다 형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머니는 효빈김씨로 세종과는 다른 후비 효빈 김씨라는 사실 뿐이다. 경녕군과 충녕군은 서로 출신성분 자체가 다르다.


그럼, 태종의 셋째아들은 누구일까? 세종일까? 아니면 경녕군일까? 경녕군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답은 둘째로 알고 있는 효령대군이다. 드라마 세종대왕에서는 경녕군을 효령대군보다 아우(?)로 했었던것 같다. 기억에 의존하는 관계로 틀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상식으로는 경녕군이였다.

사실 경녕군은 태종(이방원)의 첫째인 양녕대군(1394년) 다음 1395년에 태어났다. 그러니 1396년 태어난 효령대군 보다도 형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이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는 될 수 없다. 물론, 의붓 큰어미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종의 3번째 아들 세종(이도:충녕대군)은 잘못된 것일까?  답은 아니다, 세종은 태종의 3번째 아들이 맞다. 이유는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3번째라는 것이고, 적통을 이을 3번째 왕자가 세종(충녕군:이도)이란 뜻이 된다. 왕의 계승서열 3순위인 3번째 왕자라는 것이다. 사사로이는 경녕군이 충녕군(세종)의 형이 되지만, 왕통서열은 존재조차 미미한 후비의 소생이 된다. 물론,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가 후비가 되거나 폐출되어 폐서인이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왕가의 일은 적자/서자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다. 양반, 서얼을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서얼은 처주지도 않았다. 특별히 기록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또한, 정비의 소생이냐 후비의 소생이냐의 차이에 따라 신분은 하늘과 땅이 되는 것이다. 같은 왕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마디로 역사를 연구할때 적자, 서자, 적통를 구별할 줄 모르면 삼천포로 빠진다.  

설마 성골.진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신라가 조선과는 다르다고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왕위를 잇는데 신라가 조선보다 오히려 더 엄격한 기준이 있었지 않겠는가? 진골도 아니고, 성골임금인데 말이다. 사실 글쓴이는 성골.진골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살피고 살펴봐도 성골은 없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파고들면 파고 들수록, 왕족, 귀족의 구분만 읽었다. 

그럼 다시 신라의 선덕왕(덕만)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자.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632년)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 각간(角干)으로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의 끝누이였다.  - 삼국사기 신라 춘추왕 원년

이제 요즘과는 다른 적자/서자, 양반/서얼 등 왕가의 룰이나 양반가의 룰에 따라, 읽어보자.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장녀(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김춘추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의 딴지맨인 일연이 삼국사기 선덕왕 즉위년 기사에 딴지를 걸지 않는 이유는 일연도 마야부인의 맏딸로 덕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딴지맨 일연이 삼국사기에 딴지를 걸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에 진평왕의 늙으막에 얻은 승만왕후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니 일연은 선덕 또한, 진평왕의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승만왕후에 아들이 없어 왕통을 이을수 없었기 때문에 덕만이 마야부인의 소생으로 왕통을 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연은 삼국사기에는 없는 덕만이 나이가 어렸을 것으로 짐작하는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덕만의 결혼기사이다.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여왕이 왕위에 있을때 결혼하고 있다니, 덕만이 왕위에 오를때 어렸다는 결정타가 아닌가? 물론, 남자왕처럼 비를 많이 바꾸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누구를 누구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첫결혼이라고 생각하는게 맞지 않을까 한다.

현존하는 <화랑세기>를 의심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누구도 하지 않은 이야기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이제 예고한 대로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을때 덕만에 대한 평가를 보도록 하자.

위의 문장은 선덕(덕만)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하자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 문장은 뒤의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내용을 수식하기 위한 내용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덕만과 관련된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예사로 넘기기 어려운 기록이 있다.

성품이 너그럽고,어질다
  영묘사 화재사건을 일으킨 <지귀설화>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지귀와 덕만 공주시절(?) 영묘사에서 만나다. 

<김유신의 춘추/문희불쇼>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공주시절 덕만이 엮어준 김춘추와 문희 
어찌 되었던, 현존하는 화랑세기가 진짜던 가짜던 상관없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만으로 김유신 감독, 각본, 주연, "김춘추를 내사람으로 " 드라마에서 등장한 덕만이 신라 여왕(632년~647년) 시기에 있었던 일이 아닌 진평왕의 공주시절(628년 이전)에 있었던 일임을 증명하였다. 


총명하다.
<모란꽃,모란씨서되>
 [역사이야기] - 덕만의 자격지심, 627년 11월에 들어온 모란씨 서되

민첩하다

200
631년에 진평왕 말년 <칠숙의 난>
[역사이야기] - 미실의 충복 칠숙, 사실은 왕위 계승 일순위자

아직도 <성조황고>를 들어서 덕만은 나이가 많았을 거야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분이나 "그건 니생각이고"라고 하는 분들은 [역사이야기] - 이요원보다 남지현 나이때 왕위에 오른 덕만 <황고>에 대해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근거를 제시했다. 귀찬으신 분을 위해서 요약하자면, <성조황고>는 성스런 조상을 둔 임금(황제)의 성숙한 여식이란 뜻이다.

너무 어릴때 628년이전 문희와 김춘추를 얶어준 사건이 628년이라면 너무 덕만이 이른시기가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덕만이 632년 왕위에 오르고, 632년 결혼하고, 연호를 바꾸는  것을 근거로 635년 18~20세 전후라면 <모란꽃>, <김유신불쇼> 사건들은 덕만으로서 너무 어릴때 사건이 아닌가 의심할 수 도 있다. 

632년 16세에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면, 627년은 11살때 일이고, 628년이면 12살때 일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좀 어려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모란꽃 사건은 늙은 왕이 아주 어린 공주에나 물어 봄직한 말이 아닌가? 그리고 당시엔 깜짝 놀랄 추리 능력을 보인 덕만을 보고, 진평과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용봉의 자질이 보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기록이  "
총명하다"는 기록으로 남았다면 어떨가? 또한, 12살이전에 있었던 김유신의 불쇼에서 살려준 문희와 그의 복중 아들 법민은 어떨까? 어리지만 너그러워움의 상징이 아닌가?  지귀심화에서 신분도 미천한 지귀를 위해서 행한 행동들은 "너그러움" 자체이다. 또한, 지귀심화로 소실된 영묘사와 잦은 화재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할때 처리하는데 부적같은 주문을 만들어 백성들을 안정화 시키는 것으로 너그러움과 총명함과 민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志鬼心中火(지귀심중화)    
 燒身變火神(소신변화신)
 流移滄海外(유이창해외)
 不見不相親(불견불상친)


"너그럽고, 어질고, 총명하고, 민첩하다" 라는 말은 선덕왕이 왕위에 오를때, 단순한 미사어구가 아닌 , 덕만은 <성조황고>이니 정통성에 하자도 없을 뿐만 아니고 충분히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PS. 사실 세종대왕의 기사는 천명과 덕만은 같은 어미의 자식이다.라고 주장하는 혹시 모를 딴지가 들어올 반박문을 위해서 남겨두었습니다만, 이제 노출합니다. 이외에도 연산군과, 광해군의 출자를 비교해 본다면, 왜 적통 적자/서자에 연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실 암투의 시작과 끝은 적자들간에도 있었지만, 서자를 낳을 수 밖에 없는 정비와 후비들 사이에도 있었습니다. 후비가 정비가 되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소생들인 왕자나 공주들은 인생의 역전 대박 로또가 되니 말입니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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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오호.. 2009.07.30 2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보고갑니다. 이복형제라.....

  3. 헤윰 2009.07.30 2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해하기 쉽게 정리 하시느라 고생하셨겠어요.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4. 재밌네욤 2009.07.31 0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보았네요~~ 그런데 저도 앞에 계신 '성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신라시대의 골품제와 조선시대의 적장자 제도를 같은 기준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두 사회 모두 철저한 신분사회였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골품제와 적장제도를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조선시대 등장한 적장자의 개념

    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저는 님께서 마지막 부분에 "설마 성골.진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신라가 조선과는 다르다고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쓰신 부분에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역사를 전공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이렇게 단적으로 이야기를 하실 수 있을런지...

    각기 다른 시대의 신분제도를 이렇게 단편적으로 이어서 생각할 수 있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물론 그 만큼 강력한 신분 사회였다는 점을 부각하고 싶으셨다는 느낌은 듭니다만...

    이러한 유교적인 관례가 뿌리 내린 것은 조선 성종 이후 경국대전 체제가 완성된 때 부터 입니다..

    단적으로 고려시대에는 왕의 후궁 중에 시집갔다 온 과부도 있었답니다..

    조선시대에 이런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겠죠..

    조선 초기의 족보에는 딸의 이름도 들어 있었답니다. 하지만 중기이후에 대전체제가 완성되면서 부터 아들

    을 중심으로 족보가 쓰여지고 있지요...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적서는 비슷하고, 신라가 더 강경했지요..

      이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으로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중기 이후다라는 말씀을 하시다니..

      남.여, 적서 차별 등 중기 조선 중기이후에 심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서 초기 기록을 내 놓은것 아닌가요? 그것도 살펴 보시길..

      왜 하필 조선의 초기기록을 들어서 조선과 신라를 비교했겠는지요..

      이글로 답변이 충분히 되었기를..
      님들은 저의 주장을 더욱 강고하게 하는 보론 성격입니다.. 반론이 아니공..

  5. 흐음... 2009.07.31 0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클이 되겠습니다만.....그냥 왠지 썩 잘 읽혀지는 글은 아니라서....뭔가 말이 맞지 않네요. 제 이해력이 딸리는 것인지....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이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는 될 수 없다. 물론, 의붓 큰어미이기는 하다."

    ㅡㅡ>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의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의 아들(혹은 소생)이 될 순 없다. 물론, 그의 의붓 큰어미 이기는 하다." 라고 쓰셔야 말이 될듯 하네요.

    또 " 그러니 일연은 선덕 또한, 진평왕의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일연은 선덕 또한" 다음에 왜 진평왕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쓰신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_-;

  6. 딩가딩가딩 2009.07.31 0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

  7. Favicon of http://otiliayoo@hanmail.net BlogIcon Blah 2009.07.31 0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 기억이지만 그전 국사선생님 중 한 분이 조선에 유교사상이 들어오기 전까진
    남존여비사상이 조선같지 않았다...고 하셨던 생각이 납니다.
    한 예로 여자가 재가를 하는 건 꿈도 못꾸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그전까지만해도
    여자들의 혼인이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고 하시면서요.

    암튼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요즘 재밌게 보는 선덕여왕 더욱 재밌게 볼 수 있겠습니다.

  8. 가야진 2009.07.31 0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때는 사실 한 어머니, 한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게 사실 의미가 불분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혼은 허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남녀 모두가 중혼적 성격을 가진 연인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자식도 모계사회인 신라의 골품제에 따라 진골까지는 신분을 부여 받았으니까요.

    여성의 힘에 대한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요즘 천추태후 등에서도 황제가 죽은 후 연인을 두는 모습이 그려지잖아요. 그리고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다수의 역사서에서도 조선의 유고 사상 또한 중기 이후 정착한 것이고 이전의 사회에서는 여권이 힘이 상당했을 것이라고 보잖아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남성사회로 이어져오긴 했지만, 전쟁이 많은 나라에서 남성의 권력이 사회의 기득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고 생각해요.(내조의 여왕처럼 전쟁에 나간 남성을 대신한 실질적 정치가 아내와 어머니등의 여성이 상당했으니까요.)

    이야기가 약간 옆길로 가긴 했지만, 저는 천명이 마야의 자식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잉첩들도 순수 혈통인 성골 출신으로만 이루어 져있기는 해도 이미 족강된 후이고, 천명이 후비의 자식이라면 정비의 자식인 덕만과 나이가 비슷한 상황에서 왕위계승자인 아들이 없다고해도 마야소생 이외의 인물이 권력을 가지기는 힘들지 않았을까요?

    신라에서 초혼은 대부분 왕을 제외하고는 여성의 골품이 더 높거나 같은 진골이라 해도 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여성이 자신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이와 하는 것이 일반적이 잖아요.


    예전에 어디서 들은 말인지, 읽은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 머리 속에는 성골에서 족강되면 진골의 가장 위 계층이 되고 최근에 족강된 사람이 더 오래전 족강된 사람보다 힘이 있다는 기억이 있거든요.
    이것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천명이 마야 소생이 아니라면 용수와 천명의 결혼은 불가하지 않았을까요?
    천명의 어머니가 성골이었다해도 용수보다는 더 오래전에 족강되었을테니까요.

    아, 글을 쓰다보니.... 아닐 수도 있겠네요. 천명의 어머니가 용수보다 나이가 어리다면, 저것도 가능하긴 할 것 같아요.

    휴, 요즘 선덕여왕 때문에 도서관에 선덕여왕 관련 책을 다 봐서 역사 공부는 되는데, 드라마 나이 설정이 뒤죽박죽이라 덕분에 제 머리도 뒤죽박죽이예요.

    글이 길어져버렸네요. 암튼, 저는 천명이 후비소생일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글 덕분에 경녕군 이야기는 처음 알게 됬어요. 브라보~!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후비이거나 마야이전 정비라고 했던것 같은뎅..
      족강은 조선이 더 심했지요.. 신라보단

      오르기도 힘들고, 내려가기는 쉽고, 하지만, 조선의 전란이후는 다르지만.. 돈을 주면 언제든지.. 파고 사는게 족이였으니요..

  9. 오타발견!! 2009.07.31 05: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갓쉰동님께서 쓰신 글인가요? 잘 봤습니다.

    코를 찔찔 흘리며 다니던 어릴 시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관계로 우연히 지나치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드라마 선덕여왕도 너무 좋아합니다.ㅎㅎ)


    여러 모로 도움이 많이 됐던 글인 것 같아 잘 보고 갑니다.

    근데, 서론에 나오는 일연의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지은 그를 말씀하시는게 맞겠죠?


    예를 들면, 진수의 삼국지를 배송지가 주석을 달아서 했던 그런 부류와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어쨌든, "의의를 제기" 라고 쓰셨는데, 의의라는 것은 '말이나 글의 속 뜻' 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이의를 제기" 라고 쓰셔야 할 듯 하네요.ㅎㅎ

    문맥상 '다른 의견이나 주장' 이 들어가야 맞을 듯한 전개네요.ㅎ

    어찌됐든 잘 보고 갑니다.^^ㅎㅎㅎ

  10. 향수 2009.07.31 06: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조목조목 잘 비교하시면서 쓰셨네요..
    그저 알려진 정도의 역사만 알뿐이었는데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되어 기쁩니다
    앞으로도 이런글 열심히 써주세요..
    부지런히 읽어드릴께요..

  11. 제가 알기로는 2009.07.31 0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명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미실과 천명 모두 오직 <화랑세기>에만 기록되어 있어 그 둘이 가상의 인물일 확률이 높다고 들었습니다.그런데 또 이런 글을 보니 흥미롭네요.^^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천명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공히 있는뎅..

      3녀인 천화를 말씀하시는것 아니신지요?

      화랑세기에는 덕만이라고 하지 않고, 왕의 시호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덕, 천명, 천화.. 조금 냄새가 나지요.. 선화의 다른 이름 같은 천화라..

      흥미로웠다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__^

  12. 재주소녀 2009.07.31 0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렵지만...잼있네요~
    댓글 쓰는거 어려운거 아니네요
    ㅋ 부끄럽지만 처음 써봅니다.

  13. 캐스퍼 2009.07.31 0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어 보았습니다....
    글이 잘 정리 되신다면... 후에...
    "계급사회 변천사"를 쓰세요....
    아직까지....
    삼국시대 이전부터.. 그 이후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근대화 시대....
    변변한 "계급사회의 변천사"가 없었습니다...
    아주 좋은 책이 될것으로 보입니다...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8: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어려운 말씀을 저는 그정도는 아닙니당.. 제 밥그릇도 있는뎅.. ㅠ.ㅠ.

      즐기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당.. 고수는 널려 있는게 강호의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칭찬은 ㄳ히 받겠습니당.. 염치불구하공..

      물론 추천도 때려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댓글들을 다시는 분들이라면.. ㅋㅋ ^___^;;;

  14. -- 2009.07.31 1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은 잘 읽었습니다만...

    역시 신라의 골품제와 조선의 적서개념을 뒤섞으면 안된다는 댓글 의견에 동의합니다..

    적서개념은 부계를 따르는 것이고

    골품제는 부계와 모계에 모두 적용되는 겁니다..

    두 가지를 같은 원리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부계뿐 아니라 모계혈통도 중시되었기 대문에 지소부인이 힘을 쓸 수 있었던 것이고

    선덕,진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죠.

    너무 사료를 쉽게 자의적으로 해석하셨네요...

  15. Favicon of https://azcaprice.tistory.com BlogIcon 아르제크 2009.08.30 0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 초기에 왕가의 적서 문제가 엄밀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이성계가 자신의 이모형 이원계가 '서자'라고 몰아 아버지 이자춘의 다루가치 직을 대신 취했기 때문
    (이 때문에 이원계의 자녀들은 이천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성계로부터 이반합니다)
    2. 이방원이 '서모'인(그러나 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세자 방석을 '서자'라는 이유로 폐했기 때문
    3. 성리학의 부계일원적 구조를 이제 막 도입하는 시기였기 때문(또 태종 스스로가 성리학자이기도 했고요)

    왕가는 자신의 정통성 확립과 함께 사회변혁에 대한 솔선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적서 구분에 목을 매단 것입니다.
    실제 여말선초 사회에서 적서의 구분은 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애매모호한 측면조차 보입니다.
    그것이 조선에 들어서 세월이 흘러갈수록 점점 적자만을 인정하는 형태로 변해간 것이죠.

    예를 들어 조선 초기의 재상인 하륜은 3대째에 적손의 대가 끊기게 되었는데, 이 같은 사실을 접한 당시에 이러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하륜의 서손을 적손으로 인정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죠. 그런데 논의 결과, 공신 집안 하나를 우대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고 나라의 법을 확실히 하는 것은 국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특별 대우는 해줄 수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만일 적서의 구분이 이미 당연하고 엄밀한 것이었다면 이런 논의 자체가 있을 수 없었겠지요.


    꼭 신라까지 갈 것도 없이 고려말만 보더라도, 이모형제(이원계-이성계-이화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 이부형제(이성림-염흥방)와 같은 케이스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관직에 등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엄밀한 적서차별과 재가녀의 자식에 대한 천대를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신라시대에 성골 진골 구분의 실체가 없었을 거라는 의견에는 저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좀 읽은 사람으로서 동의합니다만, 갓쉰동님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서도 독자들에게 성골진골을 구분하는 신라라면 적서구분이 있었음이 당연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요.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8.30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성골/진골을 믿는 사람이라면 단서가 붙은 거지요.. ^___^

      왕은 무치인데 적서의 차별이 있었겠습니까만은,, 공식적인 왕비의 후손이 왕통을 잇는것은 당연한거지요.. 1차 고려를 한다음 다음 수순으로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후계의 선택은 왕에 있는 것이고,,적이던 서던 말이지요.. 그러니 적서의 차별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요..

  16. 냠냠냠 2009.09.22 2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초혼이라고해서 나이가 어렸을껏이라고 생각하는건 말 그대로 '짐작'이겠지요.

  17. Favicon of http://kr.blog.yahoo.com/sppopsj BlogIcon 천산 2009.10.14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국유사왕력보에 기록된 배필이 되는 飮갈문왕이 누구인지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수절이라는 말을 쓰려면 남편이 죽은 후가 되는데, 갓쉰동님은 飮갈문왕이 선덕여왕 시절에 이미 사망한 사람으로 알고 계시네요! 왜 그렇습니까? 님의 주장대로라면, 서기634년에 飮갈문왕을 세웠는데, 언제 사망하였다는 것입니까?

  18. 레아 2009.10.22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이 젊었을때 즉위를 했다는 것에 대해선 태클을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평왕은 10대 중반의 나이에 등극을 해서 왕위 계승기간이 자그만치 50여년이 되는데 선덕여왕이 젊은 나이에 등극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선덕여왕이 젊은 나이에 등극을 했다면 그건 진평왕이 임기 말년에 마야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았다는 이야기 이며 더욱이 마야부인도 진평왕과 나이차이가 많이 났을 터이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10.22 2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선덕여왕은 젊었을때 즉위한 것 같아용..
      마야부인이 천명의 어미라는 기록은 없지용.. 반면에 덕만은 마야와 진평의 딸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거든요. ㅋㅋ

  19. Favicon of http://kelvintrote.blogspot.com/2012/04/all-natural-devastation-survival-kits... BlogIcon soup can storage rack 2012.11.01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 더욱이 마야부인도 진평왕과 나이차이가 많이 났을 터이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20. Favicon of http://blog.frents.com/fractional-ownership/fractional-ownership/ BlogIcon invisible fence for dogs for sale 2012.11.05 14: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명의 동생이라고 했을까? 그건 화랑세기에 맡기도록 하자.

  21. Favicon of http://www.turks.us/article.php?story=20061205100319652 BlogIcon Housing prices 2013.05.01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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