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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쉰동 꿈꾸는 삶
선덕여왕 31회에서 덕만(이요원)이 만나도 만날수 없었던 소화엄마를 만났다. 이제 소화(서영희)를 죽음에 몰았다는 자책에서 벗어날수 있는 덕만이 복수를 하겠다는 믿음도 사라지는 것인가?

미실은 더이상 이용가치가 없다는 소화를 살려두려고 했지만, 어찌하여 미실(고현정)의 부하들은 소화를 죽이려 하였을까? 미실파의 균열이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실파는 사다함의 책력을 찾을때 서로 의심하고 미실의 뒤를 캤었다.

칠숙이 진평왕시기에 이찬의 직위를 얻을 수 있었던 배경으로 덕만의 의붓어미인 소화를 살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설정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덕만의 이름처람 덕이 충만하였기 때문인가? 어째든 칠숙(안길강)이 정계에 진출하는 과정을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해진다.

덕만과 소화의 모자상봉



전면에 등장하는 문노

8세 풍월주 국선 문노(정호빈)579~582

소화는 덕만에게 자신이 험한일을 당할뻔할 때 도움을 준 사람이 문노(정호빈)라고 말한다. 또한, 칠숙은 미실에게 문노가 나타났다고 이야기를 한다. 

비담 또한 문노의 제자라는 사실이 전해진다. 부제인 보종(백도빈)을 풍월주에 오르게하겠다고 미실은 말한다. 또한 칠숙을 통해서 미실파의 화랑의 단결을 모색한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유신(엄태웅)에게 자신의 막내아들인 보종(설원랑/미실)을 잘 돌봐줄것을 요구한다. 보종은 579(80)년 생이다. 나이가 유신보다 15여세는 많았다. 하지만 미실의 눈에는 보종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원상화가 되어  화랑의 스승이되고 무의 스승이 되도록 한다. 칠숙에게 문노와의 라이벌의식을 자극한다. 이에 칠숙은 자신을 믿어 달라고 한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풍월주 위에는 <상선>이란 제도아닌 제도가 있다. 이는 전직 풍월주들의 모임처럼 비상설기구이다. 풍월주제도에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처럼 10화랑이 없었던것 처럼 원상화는 없다

문노는 비담의 이야기를 듣고 칠숙의 원상화 즉위(?)식에 참여를 한다. 문노는 국선의 빈자리를 다시 찾으려 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31회의 하일라이트는 문노가 칠숙의 원상화 즉위식에서 벌린 무공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국선의 지위에 참여를 하겠다고 선언을 한다.

미실은 진흥왕의 명령으로 화랑의 체계를 세우고, 진지(금륜)을 폐하는데 같이하고, 미실이 자신이 윤궁과 결혼하게 만들어 주었는데 어찌하여 자신과 대립하여 덕만을 빼돌리고, 다시 돌아왔는가? 묻는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문노의 아내는 윤궁이고, 윤궁은 한번 결혼을 한 후 실패하였다. 그래서 미실이 윤궁에게 결혼하도록 부추켰다. 사실은 비보랑이 문노와 윤궁을 연결시켜준 메신저 였다. 윤궁은 우리 역사에도 유명한 거칠부(황종)의 딸이다.
 
거칠부는 임술년에 죽었다?
 

그런데 문노는 미실에게 자신의 장인인 "거칠부가 덕만과 천명인 쌍음이 태어나던날 죽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거칠부의 죽은 배후에 미실이 있는것이 아닌가? 물어본다. 잼있게도 거칠부의 사망년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거칠부의 사망년은 <임술년>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천명과 덕만의 출생일을 <임술년>이라고 주구장창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 문노의 입을 통해서 쌍생이 태어날때 죽은 거칠부는 임술년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임술년 언제 죽었을까? 궁금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2009/07/21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임술년생 덕만과 천명의 나이는 몇살? 기사를 일독하기 바란다. 읽기 귀찮은 사람을 위해서 간략이 요약하면 덕만과 천명은 임술년생이 될 수 없다는 글이다. 드라마상 임술년에 죽었다면 거칠부는 602년에 죽었다는 뜻이 된다. 거칠부가 아무리 장수를 했다고 해도 602년에 죽었겠는가?

진지왕 원년 병신(576)에 거칠부는 상대등이 되어 군사와 국가의 중대한 일을 맡았다가 늙어 집에서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기록에는 78세에 죽은것으로 나온다. 약간의 이설은 있지만 통설에는 502년에 태어나 579년에 죽은 것이 된다. 그렇다면 덕만과 천명은 579년생이란 뜻이 된다. 579년은 <기해>년이다. 덕만은 <임술>년 생인가? <기해>년 생인가? 최소한 극중에서만으로도 정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극중 내에서도 중구난방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작가는 정말 대책이 서질 않는다. 

KBS 개그 프로중에 재미있는 코너가 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라 부르니 아버지가 <호부>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들은 심각하게 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하냐고 눈물을 글썽인다. 요기까지는 딱 홍길동전이다.

그런데 반전이 숨어있다. 아버지가 이제부터는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한다. 자신은 너를 낳고나서 남자로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것이다.

드라마상 어느순간에 덕만은 여왕이 아니고 알고보니 남자라고 해도 할말이 없다. 당시에 잠수함과 핵무기, 미사일이 나오지 않는게 이상할 정도로 가장 기본적인 것도 도외시 할만큼 황당무개하다. 어쩌면 첨성대안에는 드라곤인 용이 살아 있거나, 태권브이가 숨어있을지 모른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27대 신라왕이 비담이였고, 덕만은 단지 비담의 여인으로 살다고 죽었다고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문제의 심각성은 선덕여왕 제작팀은 자신들의 입으로 "신라사를 재현했다"고 선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선덕여왕 제작팀은 제작의도와는 다르게 변한 선덕여왕 프로에 "역사적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최소한 자막처리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어찌되었던 덕만은 백성에게 신권을 돌려주려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왕은 무엇인가? 신라왕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미실에 대한 분노가 왕이 될 수는 있지만, 분노가 왕의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 덕만이 왕이 되는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덕만에게 미실보다 무엇이 나은지 증명하라고 한다. 끝없는 게임속 미션의 연속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덕만이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면서 커가고 있는 성장드라마이다.

끝없는 사랑의 스토커 칠숙 사랑은 이뤄질까?


이뤄질수 없는 사랑 칠숙과 소화

칠숙은 한밤중에 소화를 찾아간다. 하지만 소화는 칠숙을 두려움에 멀리하고 도망친다. 물론, 소화는 칠숙으로 부터 받은 사랑을 잊지를 못한다.

그리고 칠숙이 이야기한 "둘이 산속에 들어가 살자"는 말을 회상하고 칠숙을  찾아나서지만, 칠숙은 어깨를 축 느리고 소화를 놓아주려 한다.


칠숙은 소화곁에 있지 못하고 미실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이야기한다.

미실을 만나고 온 칠숙를 소화가 찾아온다. 또한, 처음 대면했을때 너무 놀라 그랬다고 이야기를 한다. 칠숙은 소화가 놀란것으로 잊어 버렸던 기억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칠숙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안타갑다는 듯 이야기한다. 아랫것들의 숙명이라고 말하는듯 한다.

덕만은 칠숙의 원상화에 대해서 자신을 잡으려던 집요함과 무술을 화랑들에게 잘 전수해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화랑들의 발전이 있을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화랑이 잘되겠느냐? 미실?" 하고 묻는 것이다. 덕만은 미실에게 "오래 살라"고 악담을 한 적도 있다.

국선 문노 제자인 비담의 성정

어린비담과 요람속 덕만

소화는 국선 문노에게 제자의 이름이 비담인지 물어본다. 문노는 비담이 어릴적 "비담아 너의 반려자가 될 공주"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 소화는 비담이 진지와 미실사이에 난 아들임을 문노로 부터 들은것 같다.

그래서 소화는 비담과 덕만을 결혼시킬 수 없어서 문노를 피해 사막으로 피신을 한다. 결국은 칠숙도 피하고, 문노도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덕만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한것이다. 터미네이터 칠숙만 아니라면 덕만과 소화는 행복하게 살아가지 않았을까?


문노는 이미 비담이 진지와 미실사이에 낳은 아들임을 알고 있었고, 진지는 미실이 자신의 아들 비담을 버릴것을 알고 문노에게 부탁한것이다. 문노는 비담을 덕만과 결혼을 시키고, 사위왕을 만들어 신라를 접수한후 진흥왕(이순재)의 유지를 받들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화가 문노에게서 벗어난 이유중에 하나가 비담(진지/미실)의 어미가 미실이고, 그런 비담을 덕만과 혼인을 시킬 생각을 한 문노로 부터 벗어 나는 것이이다.

어린 비담이 죽인 유민들

문노는 소화에게 "그때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문노와 소화의 대화를 들은 비담은 자신과 덕만이 결혼을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비담은 옛일을 회상한다. 그리고 문노가 덕만과 결혼시킬 계획을 철회시킨 이유를 상기한다.  


동굴속에 숨어 있던 유민들을 솥에 독을 타서 죽여버린다. 그런데 어린 비담은 자신이 "다 죽여버렸다"는 사실을 태연히 말한다. 이런 비담을 본 문노는 비담의 성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의 납량극을 보는것 처럼 섬뜩하다.

그런데 왜 문노는 비담에서 무술을 전수 하고, 책략과 계략들과 가야의 암어를 해독하는 방법까지 전수를 했을까? 대부분 무협사극에서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정상적인 사부는 무공을 폐하고 마는데 말이다. 결국엔 비담이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문노가 키웠다는 뜻인가?


새로운 꿈을 꾸는 비담

비담은 "내가 만일 덕만과 결혼할 수 있다면 신라의 왕좌가 내가 될수 있다"는 꿈(반역)을 꾼다.

그런데 과연 비담은 647년 1월 덕만을 향해서 반란을 획책했을까?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삼국사기를 자세히 본다면 비담은 덕만을 향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덕만의 뒤를 이은 진덕(승만)을 향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비담이 명분으로 내 세운 "여왕은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과거형이 아닌 미래형이다.
비담이 난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이유는 2009/08/31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비담이 덕만을 배신했다고? 사실은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풍월주의 지위 계승
 

14세 풍월주 호재(호림) 고윤후역 602~612년까지 풍월주

<선덕여왕>에서는 화랑의 전통에 따라 15세 풍월주를 세우려고 한다. 그런데 비재를 통해서 풍월주를 만들려고 한다고 했지만, 드라마 선덕여왕이 모본으로 삼고 있는 화랑세기에는 비재를 통해서 풍월주를 세우지는 않는다. 단지 현재의 풍월주의 부제가 다음 풍월주에 오르는 것 뿐이다.

예외가 있다면 유신의 아비인 서현은 12세 보리가 풍월주에 있을 때 처음 부제에 있었다.
하지만, 13세 풍월주가 되는 용춘을 위해서 부제의 지위를 용춘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용춘은 보리의 뒤를 이어 596년 13세 풍월주에 오른다. 그리고 602년 14세 풍월주인 호재(림)은 612년까지 장기집권한다.


14세 풍월주인 호재(림)의 뒤을 이어 15세 풍월주에 오른 이는 유신이다. 그런데 유신이 풍월주에 오른때는 612년 18세가 되던 때이다. 지금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비재를 주관하는 국선 문노는 8세 풍월주 였는데, 문노는 606년에 죽는다.

만약, 드라마 선덕여왕식으로 비재를 통해서 풍월주를 세웠다면 보종이 가장 뛰어난 기재라고 말을 하지만, 602년 부터 612년까지 횟수로 11년을 장기집권한 14세 풍월주 호림(호재)가 무공과 기예와 전략전술등이 가장 앞서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호재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다. 불쌍한 호재가 되시겠다. 


KBS2에서는 선덕여왕과 같은 시간때에 월화드라마 <전설의 고향>을 방영하고 있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전설의 고향을 패러디 하고 있는 것인가? 어짜피 전설의 고향은 선덕여왕에 비해서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데 선덕여왕에서까지 납량극을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606년 죽은 문노가 612년 무슨일로 있지도 않는 풍월주 비재를 주관하느냐 말이다. 그럼 미실은 612년에 살아 있었을까? 이와관련해서는 다음에 기사로 송고할 예정이다.


선덕여왕이 주는 재미는 개그 모드

비재에서 보종과 유신이 다툰다. 각각 지지하는 낭도들이 보종과 유신을 두고 싸운다. 죽방은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 백만 스물셋의 유신"에 대항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는 유명세를 탄 건전지 광고의 <패러디>다. 이처럼 선덕여왕에는 현재의 일을 교묘히 극에 넣어 재미를 추가 한다. 선덕여왕에서 이전에는 죽방(이문식)과 고도(류담)의 대화에서 류담의 달인개그를 차용하여 재미를 준적도 있다.


죽방(이문식)과 고도(류담)의 대화에서 "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자 류담이 왜 계속 같은 말을 하냐고 그만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죽방 자신은 처음이야기한것이라고 말한다. 류담이 그러자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처음하는거냐? 라고 이야기 한다.  류담은 KBS 개그콘서트 김병만과 함께 달인코너를 하고 있다. 류담이 들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들었던 '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말라"는 김병만에게서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들은 이야기다. 이를 드라마에 접목을 시킨것이다.

사극은 과거의 극 같지만 알고 보면 현재를 투영해서 과거를 보는 극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2009/09/07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천추태후 사극의 묘미는 현실풍자 기사를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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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_- 2009.09.08 12: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부분 읽다 말았습니다.
    미실은 소화를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은 많이 아시는듯 하나 드라마를 평하시려면 드라마도 똑바로 보셔야지요.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9.08 15: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님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면 처리 죽음으로 생각되는거지요.. 죽이면 파렴치범이 안되는건가요? 대락난감.. 극을 소화할 능력이 안되면 그냥 보셈..

  3. ee 2009.09.08 1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실이소화살려주려고한건아닌데요
    잘못보신것같네요
    이용가치가없으니죽이라고..직접말한건아니지만..
    빗대서말한거죠..

    • dd 2009.09.08 1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윗분말씀이 맞아요
      게시자분 잘못 알고 있네요
      미실은 소화를 없애라는투로 말했지
      소화를 살려주라고 한적 없습니다
      방송 다시보세요
      미실이 시켜서 죽이려한거죠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9.08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질범이냐? 파렴치범인줄 아느냐? 이제 소화의 용도는 없다. 그러니 죽여라는 뜻인것 같아요?

      그냥 냅두라는 뜻입니다.. 어디로 가던 상관없이..

    • 아이고 2009.09.08 2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갓쉰동아
      미실의 표정에 다 드러나 있단 말이다.ㄱ-
      드라마가 괜히 있냐
      살리라는 뜻이면 그냥 장면이 빨리 전환되었겠지만
      표정연기가 괜히 있냔 말이다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9.09 01: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건 당신 같은 아랫것들 생각이고.. 그런데 언제 봤다고 반말이셈..

  4. ㅋㅋ 2009.09.08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 보면서 다들 역사 타령이실까. 이건 드라마인데.ㅋㅋ 그냥 재밌게들 보세요. 아니면 보지들 마시고 역사스페셜이나 보시면 될듯..보면서 열받아 하실까.ㅋㅋ 웃기당.ㅋ

  5. Favicon of http://blog.ahnlab.com BlogIcon 안랩맨~ 2009.09.08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안철수연구소블로그지기 안랩맨~입니다.

    마치 역사책을 보는 듯이
    자세히 서술해 놓으신 포스팅이
    압권이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가겠습니다. ^^

  6. 배리굿 2009.09.08 14: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미있는 드라마 칼람입니다..
    유용해요..
    재미도 있고,
    국사공부도 되고..
    해설이 너무 감칠맛이 나요..

  7. 알천랑짱 2009.09.08 14: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단 글 잘읽었습니다. 긴글 쓰신다고 수고하셨네요...^^

    근데 본문글을 보면 필요 이상으로 좀 비딱하게 보신듯한 해석이 있어서 한줄 남깁니다.

    미실의 부하가 소희를 처지하는 문제에서 굳이 미실파의 균열이라기 보단 그냥 지나친 충성이나 우매한 부하들의 지나친 반응 정도로 해석할수도 있지 않을까요?

    또한 드라마상의 덕만의 대사에서도 분명 있었지만 덕만이 미실에게 오래 살아라 라고 얘기한건 악담이라기보단 미실과 대화를 놔누면서 덕만이 많은 깨우침을 얻어서 그런말을 했다고 생각이 듭니다만...

    그리고 한두가지를 보태거나 과장을 했다 해서 드라곤이나 태권브이처럼 100, 200까지 뻥을 칠거다라는 식의 해석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역사를 토대로 한거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재미를 위해 어느정도의 과장은 작가의 권한이라 생각합니다. 하나하나 사실을 따져가면 보는건 오히려 그드라마의 재미를 저해하는 요소는 아닐런지요.

  8. Tkdrldur 2009.09.08 14: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이 너무 횡설수설하네요....

  9. 비상구 2009.09.08 15: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만이 미실에게 오래 살라는 "악담"을 했다는 부분에서 뿜었습니다. ^^;;
    그걸 악담으로 이해하시는 분이 드라마에대해서 논하는게 어이없어 댓글 남기고 갑니다.
    아직 진위 여부조차 불분명한 화랑세기를 무슨 전가의 보도처럼 들먹이며 드라마와 빗대는 글은 이제는 자제를 하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9.08 15: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 님보다 잘 해석할텐뎅..악담을 악담으로 받아들이는 님의 글 읽는 솜씨는 보니.. 님같은 분 때문에 선덕여왕이 인기가 있는 것 같습니당..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9.08 15: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불분명한 화랑세기를 인용한 건 선덕여왕인데요..그것도 모본으로 삼았지요..그리고 신라사를 재현한다고 공공연히 발표하고, 가르치겠다고 했거든요..

      저는 화랑세기 너무나 의심스러워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선덕여왕이 그것을 역사서로 인정하고 만들었는데..그레 맞추어 비판하는거지요.

      그리고 이번글은 딱 삼국사기 열전 한줄을 인용했을 뿐입니다.. 기해년생이냐? 임술년생이냐? 답은 님이 찾으셈.. 물론, 님이 이전에 알고 있었다고 보지는 않지만요..

    • 비상구 2009.09.08 2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훗..여전히 덕만이 미실에게 오래 살라는 "악담"을 했다고 하시는군요. 드라마 다시보기를 꼭 권장합니다. 덕만이 유신에게 미실에게 오래 살라는 말을 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구구절절히 말을 해주니까요.

      그리고 기해년생이던 임술년생이던 물론 이전에도 알고 있지 않았고, 앞으로도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같은 고등학교때 배운 알량한 국사지식을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선덕여왕 정도면 사극은 충분한 의미이기 때문이죠.

      그런면에서 선덕여왕이 님의 폭넓고 깊은 역사지식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월화드라마가 아니라 주말 MBC역사스페셜로 방송이 되어야 될 듯 싶네요. ^^;;
      MBC에 한번 건의해보시죠.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9.09 0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님처럼 생각하는 분들 때문에 사극이 중요한겁니다. 알고 보면 상관없지만, 님처럼 모르면서도 드라마를 보고 역사이야기를 한단말이지요..

  10. 김지연 2009.09.08 16: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님, 미실이 소화가 더이상 필요없다고 보종에게 명을 내렸지요. 알아서 처리하라고..(죽이라는 뜻..)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9.08 16: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님의 해석도 맞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음 대목이 있잖아요.. 인질극이나 하는 파렴치범으로 만들것인가? 이제 소화의 용도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죽여라라고 해석하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이전 미실파 내에서 삐끄덕 거린 내용도 첨가 했잖아요.. 해석은 각자.. 이정도로 하지요.. ^___^

  11. Favicon of http://134565 BlogIcon 사회적 책임차원에서... 2009.09.08 16: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을 즐겨보는 시청자로서..
    이제는 제작진들의 변을 들어봐야 할 시기가 왔다고 봅니다.
    그동안 수많은 엇갈림으로 역사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어 왔지만..
    계속해서 이런식으로 방치되서는 안될 것이며..
    제작진의 기본 제작의도는 살펴볼수 있는 기회는 꼭 있어야 된다고 사료됨.
    왜냐하면 진정한 국민드라마가 되고자 한다면..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9.08 16: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데 반응을 안하는게 선덕여왕의 특기입니다..

      처음.. 칠성이 8성이 된다는 건 과학적 사실이라고 반론을 제기한 것 같은데..그외는 보지 못했음..

      저야 북두칠성은 자세히 보면 8성이란 사실을 그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덕여왕팀의 손을 들어주었지만요..

  12. 크로버 2009.09.08 1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비담이. 마치... 열강에.... 한비광 같아 보였슴. ㅋㅋㅋㅋ
    어릴적 동굴속 살인 보구 ㅋㅋㅋㅋ 제가 다 죽였어요 ... 아무 꺼리낌없이....
    신지 전사ㅋㅋㅋㅋㅋ

  13. 다오라 2009.09.08 17: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의 전개나 주어 생략이나 조사 사용까지.. 친절한 글은 아니었지만 끝까지 읽었습니다.

    사람마다 역사극을 보는 시각이 다르겠죠.
    어떤이는 실제 역사와 너무 다르다며 비판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이는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며 그저 즐기자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같은 드라마를 보고도, 같은 대사를 듣고도 저렇게 다르게 해석할 수 있나, 라는 생각은 드네요.
    미실은 '소화는 더이상 필요없다.' 라며 '시정잡배들 처럼 인질극이나 해야겠냐"라고 하지요.
    살려두고 인질극이나 벌이는 짓은 하지 않겠으니 죽이라는 말이지요.

    그 부분을 두고, 미실이 어떻게 살려두고자 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쫌 의문이 드네요.
    필요없다고 한 것은 살려둘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만약 살아서 덕만과 만나게 될 경우, 자신이 소화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을 덕만이 알게되면 곤란해질테니까요.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9.09 0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별것도 아닌것에 집착들을 하시넹 해석상의 문제를 왜 집착하지요..
      죽일년놈이면 죽이라고 하는뎅. 미실은.. 월천을 죽이라고 하잖아요. 필요없으니..

      그러니 집착하지 마셈.. 윗놈은 처리하라고 하고, 밑엣놈은 알아서 기는게 상례이니.. 밑엣놈은 죽이려했나 보다 하면 되지요..

  14. sloth 2009.09.08 1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갓쉰동님 글 재미있게 읽었구습니다. ^^

    저 역시 드라마의 설정과 역사적 사실의 차이점을 찾아보는 것이 드라마를 보는 또다른 재미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차이가 제작진과 작가를 비난할 일인지는 모르겠군요. '드라마 선덕여왕'은 '조선왕조실록'같은 정사를 담은 드라마가 아니고 역사스페셜 류의 '역사 다큐멘터리'도 더더욱 아닙니다.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악역인 미실의 존재자체가 위작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드라마는 애초에 미실이 등장하면서부터 역사환타지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미실의 나이와 관련해 그 불합리함을 포스팅을 하실 예정이라고 쓰여있습니다만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불합치함'을 증명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그리고 님께서 캡쳐하신 기획의도에는 '신라를 재현했다'고 되어있지. '신라사를 재현했다'고는 되어있지 않습니다만 너무 민감하신 것이 아닌 것은 아닌지요.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9.09 01: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극과 드라마를 혼동들을 하시넹.. 대략난감.
      판타지 사극을 표방했다면 별생각없습니다. 그저 역사는 이렇다고만 이야기하고 지나갔을 겁니다. 물론, 판타지도 출생일은 지킵니다.. 극중에선.. 죽인담에 살리는 한이 있더라도..

  15. over-_-still 2009.09.08 1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화를 처리하려는 방해한 자가 저자입니다" 한 화랑이 미실에게 당당히 말하는 것으로 보아
    죽이라는 명이 맞습니다 ~ 이걸로 분열이라고 까지 해설할 것이야... 그나저나 글 잘읽고갑니다 재밌었습니다.

  16. 칭찬과비평 2009.09.08 2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체적인 글은 잘 읽었습니다. 장문의글을 올린신 점 칭찬해드리고 싶습니다.

    전체적인 구성이 좀 더 매끄러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문맥이 이리저리 튀어서 글을 읽다가 길을 잃어버리겠더군요.
    좋은 다이아몬드 원석을 잘 다듬으셨다면 최고의 뷔어가 되시리라 믿습니다.

    드라마가 역사를 얼마나 반영하는가는 정답은 없다고봅니다.

    새로운 극의 창작은 작가의 권리라 봅니다. 아쉽다고 지적하신 사전고지는 선덕여왕팀에서 받아들이셔야 할 부분이라고 동감합니다.

    전체적인 선덕여왕의 극 구성은 잘 된 작품이라고 느껴집니다.

    반전이 있고 시청자의 헛점을 파고 드는 점도 괜찮고 현실의 우리 삶을 과거의 역사극을 통해 반영해볼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역사 다큐멘타리였다면 글쓴이의 지적이 더욱 깊이 와닿았을겁니다. 다만, 이 작품이 픽션이 허용되는 드라마라는 점은 오히려 작가의 상상력과 현대 우리 삶과의 연관고리가 더 흥미진지해졌고

    신라시대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테마를 제공한 점에 오히려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건 드라마의 인기와 연관이 있을 겁니다. 잘 보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9.08 17: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지적은 항상 받는것이니.. 주의를 하겠습니다.. 다만,, 내용이 극과 역사를 비교하는 글이고 비평이 추가된 것임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선덕여왕은 잘 만들어진 드라마입니다만, 사극으로써는 0점에 가깝습니다..

      소설원작의 부실함이 드라마에 피해를 주고 있지요.. 작품내에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주인공의 출생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 문제가 심각하겠지요.. 그것을 지적하는 글입니다..

  17. ㅈㄷㄱ 2009.09.08 2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은분들이 보시는 글일텐데 님 마음대로 주관적으로해석하시고
    객관적인것처럼 설명하시면 안되죠^^
    미실은 소화를 알아서 처리하라고(죽이라고)한게 맞고요

    오래살라고한것도 앞뒤 내용봐서도 악담은 아닌거같지않나요^^
    분명 덕만은 어쩐지그런생각이들었습니다 라고하면서 진심임을드러냈구요
    미실은 그애를 안아주고싶었다고 했지않나요 근데이게악담인가요ㅋ

    긴글 잘 봤구요 다음에올릴땐 좀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올려주셨으면 하네요^^

  18. Favicon of https://ceo2002.tistory.com BlogIcon 불탄 2009.09.08 2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 역시 잘 읽어보았습니다.
    글에는 작가의 몫과 독자의 몫이 있다고 봅니다.
    어찌되었건 읽는 독자에게는 자신이 읽은 글에 대해 취와 사를 적절히 선택해야 할 것 같아요.
    자신의 의견을 글쓴이에게 너무 강요하는 것도 좋아보이지는 않네요.
    댓글들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에 한 줄 써 봅니다.

  19. Favicon of https://manzzang.tistory.com BlogIcon 도희. 2009.09.08 2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다음 주에나 볼텐데~ '선덕여왕'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군요..ㅎㅎ
    사실, 홀수 회는 자꾸 못보고 짝수 회와 리뷰들로 내용을 파악하고 있어요..ㅡ.ㅡ;
    굳이 꼬박꼬박 안챙겨봐도 내용이 파악되기도 하고~;

    오늘도~ 재밌게 읽고 가요~^^
    전~ 갓쉰동님 글 읽으면 항상 즐겁습니다..ㅋㅋ

  20. 비담이^^ 2009.09.09 05: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실은 더이상 이용가치가 없다는 소화를 살려두려고 했지만, 어찌하여 미실(고현정)의 부하들은 소화를 죽이려 하였을까?'라고 하셨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분명 극중에선 미실이 "이젠 내게 소화가 쓸모없으니 처리(!)하세요"라고 했잖아요??

    • 김우원 2009.09.09 1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습니다 이분도 참 객관적인걸 주관적인거라며 토스하시면 어떡하심 . . 댓글 중반부터는 본인도 이제 아셨을듯한데 일부러 그러시는건가 ?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9.09 1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처리해를 몰라서 그랬을것 같아요..단순해서 좋겠어요..

  21. 노랫소리- 2009.09.09 14: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재밌게 읽었네요.
    더불어 댓글까지.

    근데 글쓴이님.
    댓글들에 리플 다는 말투를 보니 점점 기분이 상하게 되네요.
    많은 사람들이 글쓴이의 의견에 아니지 않느냐는 그들의 의견을 얘기하는데
    그에 대한 글쓴이님의 리플들은 더이상 의견이 아니라 시끄럽다, 닥쳐라, 모르면 가만있어라.
    이런 느낌이 다분히 드는군요.

    본인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의 의견도 수용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 동안 덕만이 진평왕의 뒤를 이어 천명을 제치고, 왕위를 이은 이유를 이전 기사들에서 충분히 증명하고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위의 글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명과 덕만은 이복자매간이다.
둘째, 천명이 나이는 많지만 정비인 마야의 소생은 아니다.
셋째, 덕만은 진평왕과 정비 마야의 장녀다.
넷째, 천명은 덕만보다 왕위승계에서 후순위다. 
다섯째, 덕만은 왕위를 오를때 현재 이요원만큼 어렸다.
여섯째, 덕만은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했다
.


(c) mbc 사극 선덕여왕, 칠숙과 소화

이제 미실의 충복으로 설정된 칠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충실한 충복으로 덕만을 제거하기 위해 머나먼 사막까지 추적하여,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불길속에서 눈의 각막이상으로 실명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덕만의 유모인 소화를 사막의 개미지옥같은 유사에서 구하고, 사랑하게 된다.
 
앞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칠숙과 석품이 어떠한 과정을 걸쳐서 반란을 일으키는 지는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진평왕 말년에 석품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칠숙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이다.

드라마와는 다르게 칠숙은 미실의 충복이 아니라, 신라의 왕위계승권에서 최고 우선권이 있었지만, 진평왕이 덕만을 왕위에 올리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진평왕이 미리 칠숙의 반란을 눈치채고, 칠숙을 잡아들여 9족을 멸한다. 칠숙과 같이 반란에 동조하고 참여했던 석품은 백제로 도망치다가 가족이 그리워, 경주(서라벌)로 돌아와 집에서 잡혀 죽게 된다.


삼국사기에 칠숙의 반란 기사를 살펴보자.

631년 여름 5월에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꾀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시(東市)에서 목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다가 처와 자식을 보고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는 걸어 총산(叢山)에까지 돌아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해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 삼국사기 본기 신라 진평왕 53년 

칠숙이 반란을 일으킬때 직위를 살펴보자.. 이찬은 명예직에 가까운 상대등, 각간 등에 뒤이은 실질적인 일인자인  2등위의 신라 최고급 지위이다. 아찬 석품은,  대아찬 바로 밑인 6등위의 고위직에 있었다. 이들이 아들이 없는 진평왕 말년에 왕위계승권을 놓고, 덕만과 충돌하는 것이다.

칠숙의 지위로 볼때, 칠숙은 왕실과 최측근 사람이다. 석품 또한, 직.간접적으로 왕실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칠숙의 가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현재까지는 없다. 그러나 흔적은 몇몇 기사로 확인이 가능하다.

진평왕에게는 동륜과 만호 태후 사이에 난 동복 아우가 두명이 있었다.


원년(579) 8월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친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 원년

한명은 백반인 진정갈문왕이고, 백반의 동생인듯한 국반(진안갈문왕) 이다.
그런데 백반과는 다르게 국반(진안갈문왕)은 덕만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진덕(승만)의 아버지가 된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승만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 삼국사기 신라 진덕왕 원년


또한, 삼국유사 선덕왕(덕만)에는 "음갈문왕"를 보면 국반일 수 밖에 없는 "음갈문왕"에 관한 기록이 보여진다.

王之匹飮葛文王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여기서 백반도 "음갈문왕"일 수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면, 국반의 딸인 승만이 덕만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는 것만으로 충분한 반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확실한 증거를  칠숙의 반란 사건으로 증명하고자 하는것이다. 결론 부터 말을 하면 칠숙은 백반갈문왕의 아들일 수 밖에 없다.

진평왕계보도

진평왕때로 돌아가 보자,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러면 다음 대권은 누가 잡을까? 용수와 결혼한 천명이 대권을 잡거나, 신라에 빈번히 보이는 아들이 없을때나 있어도 나이가 어린 왕자를 둔 왕 다음은 사위가 왕이 되었다. 그러니 천명의 남편인 용수나 용춘이 대권을 잡아야 한다. 용춘과 용수는 최소한 용춘은 진평왕시기를 넘어, 덕만이 왕위에 있는 시기를 지나, 647년 진덕(승만)이 왕위를 잇는 그 순간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권은 덕만에게 넘어갔다. 그러니 천명은 정비의 소생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때 왕위계승 서열을 알 수 있는 진흥왕의 자손들의 계보도를 살펴보자. 

 
진평의 딸들은 천명과 덕만과 선화로 알려져 있다. 계보도는 복잡해서 진평/마야의 소생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위의 진평와 계보도에 천명과 덕만이 이복자매로 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진흥왕 계보도


아들이 없는 진평왕 다음의 대권 순위는 누가 될까?

진평의 형제인 백반과 국반이 다음 대권 후보군이다. 그다음은 백반의 자식들이고, 그 다음이 국반의 자식들이다.

그런데 국반갈문왕에게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진평과 마찬가지로 딸인 승만(진덕)만이 있다. 그렇다면, 백반갈문왕의 자식이 왕위승계 제일 순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백반의 자식에 관한 기록은 망실되고 없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칠숙의 반란사건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백반의 아들로 추측되는 이찬 칠숙은 가만히 있으면, 자신이 다음 대권을 잡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진평은 영민하고, 기지가 있는 덕만을 다음 왕위로 세우고자 한다.

또한, 덕만은 공주시절 고모부인 김서현의 딸인 고종사촌 문희와 자신의 언니인 천명의 아들인 이종조카 춘추를 결혼으로 맺어 줌으로,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용춘 세력까지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니 덕만에 왕위가 넘어가는 것을 막을려면, 백반의 아들인 칠숙으로써는 중대한 결단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평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거나, 백반이 살아 있다면, 백반을 왕위에 옹립하려고 반란을 결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쿠데타에 성공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국인(국민)이 전왕이 국정을 농단했다고 선전을 하면 그만이다. 최근까지도 대한민국에서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아주 훌륭한 선례를 남기기도 했었다. 하물며 왕이 하늘인 시대엔 오죽하겠는가? 이래 죽으나 권력욕이 넘치(?)는 칠숙으로써는 당연한 선택이 아닐까한다. 어차피 덕만이 왕위에 오르면, 숙여지내거나 숙청될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칠숙은 반란에 성공하지 못했다. 실패한 쿠데타는 가혹하리 만큼 엄중하게 처벌한다.

이처럼
백반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는 이유는 칠숙이 백반의 아들이며, 반란의 여파로 구족이 멸문지화 당했기 때문이다.

칠숙의 반란사건은 삼국사기에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이면을 추적하다 보면, 왕실내의 왕위다툼이 치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로 김유신의 아비인 김서현의 기록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기사는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 삼국사기 진평왕 51년

입니다. 물론, 김서현의 딸인 문희와 김춘추의 기록을 보면, 대장군보다 높은 소판(3등위)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추증되었거나, 김서현의 기록이 망실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칠숙의 반란 사건이 이상하고, 요상한 이유는 진평왕의 사망에 대한 다른 기록을 보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54년(632) 봄 정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 태종이 조칙을 내려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의(賻儀)로 200단(段)을 주었다.<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정관(貞觀) 6년(632) 임진 정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모두 『정관 5년(631) 신묘에 신라 왕 진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을까?
 - 삼국사기 진평왕 54년

김부식은 우리의 <고기>에는 632년에 죽었다 기록하고 있는데, <신당서>와 <자치통감>을 들어 "631년 신묘에 신라왕 진평이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을까? 왜 신당서와 자치통감이 잘못되었을까?를 반문하고 있습니다.   진평왕 죽음에 이설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덕만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634년 선덕왕 3년에 숙부인 국반갈문왕과 결혼을 하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을 깨는 글을 여러편 기사로 송고했다. 이글을 읽으신 분은 계속 머리를 흔들며 아닌데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하 충분히 그럴수도 있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번 시리즈 글에서 몇가지 소득이 있었다. 일단,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덕여왕시기에 한일 인줄 안 문희와 춘추의 결혼을 선덕여왕이 덕만공주 시기에 한일 임을 증명한 일이나, 덕만이 공주시절 모란꽃이 향기가 없다고한, "모란꽃 사건은 627년 11월에 신라에 들어왔다"는 증명을 한 것이다. 또한, 이번에는 천명과 덕만은 진평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고, 이복자매이라는 증명도 하였다.

사실 통설이란 기존의 학자가 만들어논 다수설이다. 다수설이 되기 위해서는 이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한다해서 모두 진실이 되고,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역사와 대화를 하고, 의문점을 해소해 가는 것이다.

몇편의 글들은 그동안 의문을 품어 왔던 내용을 드라마 선덕여왕을 빌어서 가설을 다시 재정립하여 세우고, 이를 검증하고, 증명하는데 있었다. 또한, 드라마를 통해서 역사를 배우는 과정에 있었다. 글쓴이는 사극이 가져오는 병폐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많이 본다. 잘못된 사극이던, 잘된 사극이던 이를 교본으로 역사를 다시 배울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오히려, 정통사극이나 명품사극을 표방하고, 스스로 당당히 그 시대를 재조명하였다고 선언한 사극이, 실은 잘못된 역사를 왜곡해 사극으로 만들어 질때 역사공부에는 더 좋은 교재가 된다.

사실 사극의 원전에 해당하는 소설이 잘못된 설정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면, 아무리 사극을 잘 만들더라도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역사이야기] - 서녀 천명의 나이 어린 적통 동생 덕만
덕만은 천명의 어린동생임 증명하는 글, 새로 업데이트 된글입니다. 관심있는 분은 본글 추천 후 크릭 ^___^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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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소대영 2009.07.26 2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부탁이 있습니다.알천량이 80세 되던해에 손자를 보게되어 집인에 경사가 났다하여 경사로울 경자로 이름을 개명하였고 이식.간 .상대등 벼슬까지 하셨으며 춘추와 왕위계승에 까지 말이 있어 나는 너무 늙었고 무덕하니 불가하다 자처하고 용맹한 춘추가 왕이되어야 한다고 사양하여 춘추한테 임금자리를 양보하였다고 우리는 알고있습니다.서기577년 생이시고 679년에(수는 110세)졸하셨으며 진주소씨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진평.선덕.춘추에 이르기 까지 왕위 계승이 평탄치 않았는데 그어려운 자리를 나이 불구하고 맡을수도 있었는데 하는 후손으로서 욕심이랄까 있지만 그땐 그럴사정도 있었겠다고 생각하고 알천량이라고 나오고 성이 없는데 그에대해서 후일 진주소씨 시조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상세히 알고쉽습니다 글쓴이 께서 저의 댓글을 보시고 바로 좀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름데로 시조의 흔적을 찾을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蘇城)의 하백(河伯)에 봉해지고 기원전 2266년 소성이 단군 조선에 영속되면서 기시가 소씨로 고쳐졌다. 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촌장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진주소씨(晉州蘇氏) 시조는 소경(蘇慶)이며 소벌도리의 25세손으로 후손이 없었는데 꿈에 소벌도리가 나타나 진주 구시동(九柿洞)으로 이사를 하면 9저를 얻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사를 한 후 660년(무열왕 7)에 9대에 걸쳐 9명의 장군을 낳았고, 이름을 소경으로 고쳤다고 한다. 소경은 648년(진덕여왕 2)에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 후손들이 소벌도리를 원시조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하였으며, 소경을 중시조로 삼았다. - 소씨(蘇氏) - 본관:진주(晉州)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년(647) 정월 17일에 비담(毗曇)을 목베어 죽였는데, 그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 알천(閼川)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 군주로 삼았다.- 진덕왕 원년

      비담이 646년 11월 상대등이 되고 647년 정월 비담이 난을 일으킨후.. 647년에 정월에 비담의 뒤를 이어 상대등에 올랐네요..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곳에 가면 진주소씨 족보를 잘 분석해 놓은 글이 있군요..

      http://hyunk02.egloos.com/1903188

  3. 소대영 2009.07.26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대영 sody06@hanmail.net.으로 글쓴이 께서 앞의 묻는 내용을 혹이라도 알고 계시면 이메일 주소로 좀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4. 2009.07.26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 읽지는못하고가지만,글진짜 잘쓰시는듯..
    >< 칠숙에 관심이 있어서... ㅋㅋㅋㅋ

  5. 궁금궁금 2009.07.26 2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이 작은아버지인 국반과 결혼을 했으면 원래 국반의 부인이자 진덕여왕의 어머니인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은 어떻게 되는건가요?
    걍 쫓겨났을까요?
    월명부인이 안쫓겨났다면 국반은 여왕을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행운아인건가요?
    아니면 여왕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두번째 부인을 들인 간 큰 남자?

    그리고 만약에 월명부인이 첫번째 부인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면, 진덕여왕이 왕이 되었을때 어머니를 월명부인으로 기록했을까요?
    물론 조선시대이기는 하지만 연산군의 어머니는 아들이 왕이 되고 난 다음에도 폐비윤씨로 기록되고 있지 않나요?
    아니면 진덕여왕이 자신의 친어머니인 월명부인을 원래 자리로 돌린건가요? 자신의 전임왕인 선덕여왕을 밀어내고?

    글을 읽어보니 더 궁금증이 생겨서요....

  6.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자리로 돌려 놓지 않았을까요? 저도 글을 쓸때 월명부인은 어찌되었을까 궁금하더군요..
    법률적 어미와, 생물학적 어미와, 법통의 어미 등 차이가 있지 않을까함.

    조선 정조도 큰아버지 아들로 입적하잖아요.. 그리고 왕이되고, 왕이 된후,, 생물학적으로 사도태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지요. .

    신라시대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을 그것으로 추측합니다. 내물왕 이전시기.. 미추왕때 보면 그의 후손들과 실성, 나물 등이 연대가 맞지 않잖아요.. 생물학적으로는.. 이건 그동안 생각햇던 건데.. 밝혀 버렸네요..

    암튼, 계승, 승계, 법통, 등에 의해서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안되는 상황이 해결되거든요.. 기회가 되면 이쪽을 건들생각입니다.. 미추왕때.. 이후를..

  7. 2009.07.26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꿈꾸는 것은 산다는 의미 산다는 것은 꿈을 꾸는 것.

    블로그의 제목과 다른 허구에 빠져 역사(?)를 탐구하는 이질적 행태

  8. 두모 2009.07.31 0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흥미가 많은지라 관심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드리고요.

    위 본문 글 중에 용춘/용수가 진평왕에 뒤이어 왕에 오르지 못한 이유가
    아내인 진평왕의 딸 천명이 정비 소생이 아니기 때문이라 기술되었는데,
    이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제가 어디 다른 글에서 보기에
    용춘/용수의 아비인 진지왕이 황음무도하다 하여 미실 등에 의해서 추방되어 죽었기에
    그 아들들인 용춘/용수는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다고 하더군요.

    성골/진골의 구분이 없는 듯 하다는 글을 쓰셨는데 저도 동의가 됩니다.
    왕족이 있을 뿐이고, 왕의 아들이 계승자가 되지만
    진지왕의 경우와 같이 죄가 있으면 박탈되는 것이 당연하고
    선덕여왕 즉위는 용춘(용수?)의 아들인 김춘추와 군부세력인 김유신이
    결합해서 옹립한 것이라 봐야죠.

    김춘추는 할아버지 진지왕의 패덕에서 벗어나는 시기가 되고
    아버지 용춘(용수?)의 공적과 자신의 공으로
    왕위에 오를 자격이 공인받게 되었다고 봐야죠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9: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충분히 그럴수 있지만.진지왕 폐위사건이 벌어진. 579년에서 632년이면 충분히 지나고도 남았겠지요.. 50년은 안되고.. 654년은 된다는 뜻은.. 글쎄요.. 그때도 안되었음.. 지금도 안되는 거지요..

      그리고 정확히는 후비가 아닌 서자도 아닌..
      정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는데요.. ㅋㅋ

      제가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역사를 비판할때 화랑세기를 인용하지 않는겁니다.. 아직은 화랑세기를 가지고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비판하기는 요원하고, 제 생각은 화랑세기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작품 같거든요..

      너무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절묘하게 절충하고 있어서요..

      후대에 나온 역사서를 절묘하게 빠질수 있다는 말은 후대 작품 아니면 있을수 없거든요..

      성골/진골이 없다는 분을 뵈오니 방갑습니다..

      즐거운 댓글 놀이 였습니다..

      추천도 해주실거죠? ^____^

  9. Favicon of http://lhykkam.naver.com BlogIcon 황금알 2009.07.31 19: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동안선덕여왕을꾸준히보지못해서 이해못하는부분에도움이 되었구앞으로보는재미에 많은도움을 주셔서감사 또감사 좋은 저녁 되세요

  10. 산행인 2009.08.05 1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관심은 많으나 잘모르는 사람입니다. 선덕여왕을 읽고 갓쉰동님의 글을 읽어면서 화랑의 성격에

    의문이 있습니다. 혹시 화랑과 낭도의 성격이 집의 사병이 아닙니까. 화랑은 집의 사병의 우두머리이고요.

    사병이 또 성장하여 사병을 데리고 군에 들어가서 장군이 되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십화랑은

    유력한 열가문의 사병이 아닙니까?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8.05 1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화랑의 다수는 귀족의 자제이고, 그들을 서포트하는 집단은 6부의 귀족이나 일반인들 입니다. 낭두..라고 해서요..

      이 낭두가 가야파에 점령된 적도 있습니다..

      이들은 낭두에서 벗어나면,, 지방의 관리나, 군대에 편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님의 말씀도 틀린것은 아닙니다..

  11. Favicon of https://saeyanbooks.com BlogIcon 도서출판 새얀 2009.08.06 23: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 이번 글도 잘 읽고 갑니다. 읽을 수록 재미가 쏙쏙~~ 사실 칠숙도 선덕여왕의 재밋거리중 하나죠.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12. 글쎄요. 2009.08.13 0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나름 논리정연한것 처럼 보이긴 합니다만

    억지로 끼워맞추기 식 이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어 유감일 따름입니다. 천명과 덕만사이의 맏이와 차녀는 누구인가, 만약 맏이가 천명이라면 왜 차녀인 덕만이 왕권을 계승 했을까에 대해서 아랫글을 보시면..

    진평왕은 진흥왕의 장자였던 동륜태자의 아들로, 동륜태자가 개에게 물려 죽자 숙부인 금륜이 진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진지왕입니다.



    하지만 진지왕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시의 집권측과 갈등이 생겨, 결국 왕이 된지 3년만에 화백회의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에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당시 진지왕에게는 두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용수전군과 용춘전군이 그들입니다.



    용수와 용춘의 존재에 대해서도 두사람이다, 혹은 한사람인데 이름이 잘못 표기된것 뿐이다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진지왕의 장남 용수전군이 진평왕의 맏딸인 천명부인과 결혼하여낳은 아이가 바로 김춘추입니다.



    진평왕은 마야왕후가 죽은 뒤 새 왕비를 들여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이 일찍 죽자,후계에 문제가생겼는데,

    전통대로 왕의 사위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권력을 쥐고 있던 화백회의측이 폐위시킨 진지왕의 아들( 당시엔 용수전군은 죽고 천명은 용춘전군과 재혼한 상태였음)이 왕이 되므로, 화백회의측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고,



    진지왕의 폐위로 왕위에 오른 진평왕또한 이를 용인하기는 곤란했을 겁니다.



    때문에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진평왕이 장녀인 천명을 불러 다음 왕위를 동생인 "덕만에게 양보해 줄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였고, 천명이 이를 "용인"하여 궁을 떠났기때문에

    덕만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게 더 논리적이지 않습니까 ?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08.13 0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다른 글도 읽어보시길.. 님은 화랑세기를 인용하고 계시잖습니까? 이글은 화랑세기를 기준으로 한게 아니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의 기록을 가지고 증명하는 글입니다..

      설마,, 화랑세기를 읽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대부분 드라마 선덕여왕에 관련 포스트를 보시면 화랑세기를 인용하고 있거든요...

  13. Favicon of http://manzzang.tistory.com/ BlogIcon 도희 2009.08.22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읽고가요^^
    댓글을 부끄러워서 잘 안다는 편인데, 재미나게 읽고나니.. 제가 드릴 것은 감사하단 인사 뿐인 것 같아서요^^

  14. 그냥 2009.09.23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고 가네요.. 역사이야기를 좋아라 하는편인데 화랑세기를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네요..1

  15. zzzzz 2009.10.22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걸 지적해야되나 좀 그렇지만 선화는 신라의 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이라고 해요;;;;;;

  16. ㅇㅇ 2009.10.31 0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갑니다 ㅋㅋ 그런데 학생인저로서는 수능과는 1g도 연관되진 않을거같네요 ㅋㅋㅋ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10.31 0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용..ㅋㅋ 아쉽지만, 비교체험 했다고 생각하셈.. 수능에 도움이 되었음 좋았을 걸용.. 역사교육의 한계인데용.. 어쩌겠어용..

  17. Favicon of http://ytrty.tistory.com BlogIcon Nehe 2009.12.04 09: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의 ㅇㅇ 님댓글에 웃음과 안타까운 마음이..... 그나저나 이번 수능에는 신라관련해서문제가 나왔을까요? ㅎㅎㅎ

  18. Favicon of http://www.bestvibramshoes.com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9. Favicon of http://www.bestvibramshoes.com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20. 새벽 2012.12.27 0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계보...진평왕은26대왕이고선덕여왕은27대인데..ㅜㅋ

  21. 윤지 2013.10.31 15: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 칠숙은 백반갈문왕의 서자라 생각됩니다.
    적자 였다면 진평왕이 처음부터 조카인 질숙을 염두해두지 않았을까요?
    아마 성골 남자 후계자가 없으니 조카인 자기에게 황위를 물려줄 것으로 예상했는데, 성골 여자(덕만공주)를 후계자로 세우자 반란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예고한데로 오늘은 덕만의 남편인 <음갈문왕>을 통해서 덕만이 왕이 될수 밖에 없는 이유와 덕만이 젊어서 왕위를 이었고, 진평왕이 죽는 과정에서 벌어진 칠숙과 석품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까 한다.


王之匹飮葛文王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으로 삼을 생각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덕만이 결혼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온다. 글쓴이는 이 결정적인 증거를 놓아두고, 일부러 아래와 같은 시리즈 기사들을 송고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덕만과 천명은 진평왕의 친자매이긴 하지만, 덕만은 마야왕후의 소생이고, 진평은 정비 마야의 후생이 아닌 마야 이전의 왕후의 소생이거나 또다른 후비의 소생일 것이다. 그러니 왕위계승우선권에 정비후생인 덕만이 우선권이 있었고, 덕만이 진평왕의 <장녀>로 <삼국사기>에 기록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일단, 인평 갑오년은 언제 해당할까? 인평 갑오년은 선덕왕 3년 634년에 해당한다.

3년(634) 봄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었다. 분황사(芬皇寺)가 완성되었다.
- 삼국사기 선덕왕 3년


삼국사기와 덕만과 관련될 사건들을 아무 생각 없이 삼국사기를 읽는 다면 이때의 선덕왕의 나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최소 48살이 된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편에 기록된 덕만이 왕으로 있고 난 3년차에 자신의 남편을 선택함을 알 수 있다.  

(c) mbc, 선덕여왕중 덕만과 천명

여왕벌이 배필을 맞이한 때가 여자로 치면 갱년기 다지난 48세이상에 남편을 얻어서 무엇에 쓰겠는가? 물론, 이때도 덕만의 후사를 잇고, 왕통을 계승할 후손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인구통계 조사중 하나인 여성가임인구당 조사를 할때, 나 가임여성 1인당 총출산율을 산출할때 연령대는 15세에서 45세로  설정한다. 요즘도 45세 이상 여성이 가임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신라시대 덕만이 이때 남편이 결혼을 했다고 한다. 물론, 첫 공식적인 남편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삼국의 시대에는 극히 나이가 어린 여자나이 13세 정도에는 첫 대다수 월경이 지나고, 이때 부터 성인 대접을 하며, 결혼을 한다. 멀리 갈것도 없이, 요즘 동남아나 아프리가에 원시 부족을 가보자 이들은 월경이 지나면 결혼을 시켜버린다. 하물며 덕만이 나이가 50에 가까운 나이에 첫 남편을 맞이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을 깨는 행위이다. 신라의 박혁거세나 알영은 공히 13세에 왕이 되고, 왕비가 되었다.

634년에 들어서 진평왕때 사용하던 연호를 왜 바꾸었을까?  대부분 나이어린 왕이 등극하고, 수렴청정이나 대리청청을 끝내고 성인이 되어 자신이 스스로 통치할 경우 연호를 바꾼다. 또는 나라의 구습을 혁신하고, 일신우일신 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에 의해서 도 바꾸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연호를 바꾼다는 행위는 기본적인 시간감각을 새로 셋팅하는 작업에 해당하는 것 만치 어려운 일이다.


진평왕의 계보도

덕만의 경우는 특별하게 진평왕때 사용한 연호를 자신의 임기3년차에 바꾸고, 공식적인 남편도 생겼다.


덕만이 선택한 '음'갈문왕은 덕만이 충분히 임신이 가능한 나이때 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후사를 보고 후손을 통해서 왕위를 물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음갈문왕은 나이가 덕만보다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때 덕만의 나이는 몇살 정도가 되어야 할까? 30대 중후반을 넘기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덕만이 진평왕의 장녀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된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 왕후의 소생만을 중심으로 카운트를 한다면 덕만은 충분히 공식적인 <장녀> 된다.


그렇다면 덕만의 남편 <음갈문왕>은 누구일까? 글쓴이는 덕만의 작은아버지이고 진덕왕의 아버지인 국반갈문왕으로  본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 있지만, 음(飮)자와 반(飯)자는 식각의 오탈자일 가능성이 높기때문이고, 결정적으로 덕만의 말년(647년) 반란이 있고,그 여파로 덕만이 죽은 뒤 국반갈문왕의 딸인 승만(진덕)이 별탈없이 왕위를 승계하었기 때문이다.

원년(579) 8월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친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 원년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승만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 삼국사기 신라 진덕왕 원년

덕만의 뒤를 이은 승만은 덕만의 의붓 딸이자, 고종사촌간이다. 이는 신라왕실에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니 덕만이라고 못할 이유가 없고, 덕만이 백반을 남편으로 삼은 이유도 후사를 볼려하는 심사도 있었지만, 왕실의 가장 큰어른인 국반갈문왕인 작은아버지의 뒷배경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않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계승서열상 승만을 자신의 자식으로 두어 왕위를 계승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하나의 증거로 천명과 다르게 승만과 덕만의 공통점은 <만>자 돌림을 쓰고 있다. 그러니 천명과 덕만은 같은 왕후의 소생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하겠다. 또한, 덕만은 죽은후 선덕이고, 승만은 즉은후 진덕이다. 이처럼 <덕>자 돌림의 시호를 받는다. 그러하니 덕만이 634년에 결혼한 남편은 자신의 작은아버지인 국반(진안)갈문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백반을 공식 남편으로 부른 이유는 창녕조씨의 족보에 처음 "이씨였던 조계룡이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경주김씨 중에 "김인평이 덕만의 남편이였다"는 기록을 염두해 둔것이다.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하기 전에 최소한 1번 이상은 결혼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김인평의 이름을 살펴볼짝시면 <인평>이다. 인평은 덕만이 연호로 사용된 <인평:仁平>과 동일하다. 일반적으로 왕의 이름자를 피하는게 상례이다. 그런데 연호와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은 의심스런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인평이란 이름을 사용하다. 연호를 사용하는 즈음 이름을 바꾸었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  

덕만, 선덕여왕의 결혼관계도

어찌 되었던 백반과 결혼전에 남편이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덕만 3년 634년에 연호와 남편을 세웠다는 기록으로 덕만이 왕위를 이은 때 나이는 10대중반이일 수 밖에 없어진다. 어찌 되었던 덕만이 연호를 바꾼 시기에 독자노선을 걷는 낭낭18세가 되었던 20세가 되었던, 덕만과 관련한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살펴볼때 덕만은 왕위에 오를때 아주 많이 봐주어서 30을 갖넘었거나 10대후반에서 20대 초반 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글쓴이의 결론이다. 그래야 삼국사기기록과 삼국유사의 기록들이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역사와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미스 캐스팅같은 유신과 덕만의 비정상적인 나이를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나이를 배재한 역할로 따진다면, 역사와 부합할 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덕만은 유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리고, 춘추보다도 어렸을 지도 모른다.


634년 덕만의 결혼상대자가 백반(진정)갈문왕과 국반(진안)갈문왕 작은아버지들 중에서 국반(진안)갈문왕 일 수 밖에 없는 수 많은 증거를 앞선 기사와 이번 기사에서 언급했지만 보다 확실한 증거를 또하나 제시할 예정이다. 

기존 잘못된 정설을 깨는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도 글이 늘어져 버렸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충복으로 나오고, 뒤늦게 소화에게서 사랑을 느끼면 미실에서 벗어나려는 터미네이터 칠숙과 석품의 난을 통해서 이를 증명할 것이다. 또한, 칠숙과 석품이 난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이유에 대한 기사를 송고할 예정이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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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middleagemanstory.tistory.com BlogIcon 영웅전쟁 2009.07.25 2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만이 유신 아니 김춘추보다 더 어렸을 지도 모르는군요...
    매일 기다려야 하는군요 ㅎㅎㅎ
    칠숙과 석품이 난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이유에
    대해서를 계속 포스팅 해주니 ㅎㅎㅎ
    고맙습니다.
    오늘도 많이 배우고 깨우치고 갑니다.
    편안한 저녁 되시길 바랍니다.

  2. 2009.07.25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 애독자 2009.07.26 1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갓쉰동님의 글을 재밌게 읽고 있는 독자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근데 이번 글을 아무리 읽어봐도 잘 이해가 안가서 질문드립니다.
    선덕여왕 - 덕만이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근거가 잘 이해가 안갑니다.
    글에보면 근거가 분명히 나와있지 않고 단순히 가임나이로 추정하신듯 해서요..
    선덕여왕이 즉위때 몇살이었는지...
    학계의 통설과 갓쉰동님의 견해를 다시한번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딴지?를 거는 듯한 댓글을 날려서 죄송하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4. Favicon of http://선덕여왕 모구에 왕위에 올랏다 BlogIcon 최낙길 2009.07.26 1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둘째딸로 진지왕때 출생한 것으로 사료된다 진평왕의 부는 진흥왕 첫째 왕자 동륜태자의 아들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음갈문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진평왕이 왕이되기전에 이미 그녀는 출생했다는 것을 의미하면 음갈문왕 즉 남편이 있었다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 또한 모구로 표시하엿는데 모구란 무엇인가 50이상의 늙은 나이을 말한다 / 진평 무려 53년을 통치하다 모반의 충격으로 인하여 진평왕이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선뎍여왕이 왕위를 계승 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것이다 선덕여왕의 출생년도를 579년으로 본다면 왕위에 오른춘추는 53세가 된다

  5. 재밌네요 2009.07.26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위에 댓글단 애독자분 말처럼요...저도 이해가 안되네요
    덕만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진평왕의 재위기간만 놓고 보더라도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진평왕이 대략 52년정도 재위했고, 드라마에서도 그무렵에 덕만을 낳은 것으로
    나오는데요 그렇게 따지면 대략 덕만이 재위한 나이가 50대 초반이라는 설정이
    맞는게 아닐까요?
    물론 진평왕이 재위 후 2~30년이 지난후 덕만을 얻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정실 부인인 마야 부인과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덕만이 어린나이에 재위했다는 것은 다소 억측이 아닌가 싶네요..^^;;

  6. 잘봤습니다 2009.07.26 14: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역사다큐를 보니까 거기서도 여러가지 주변사실을 통해 선덕여왕은 50초반 정도에 즉위했을거라고 말을하더군요..

  7. 그랑께 2009.07.30 2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계룡의 원래 성씨를 차치하고서 다시 살펴본다면, "曺"는 우리말로 즉 당시 신라말로 "마실"이다. 마실은 마을이나 관청을 가리키는 말이다. "曺"는 마실 조, 음갈문왕의 "飮"은 마실 음! 여기서 너무나 비슷한 발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실 조, 마실 음! 단지 발음의 억양이 다를 뿐이다. 음갈문왕이 "曺"갈문왕이란 말인가?

    조계룡의 후손은 엄연히 지금까지 살고 있다. 바로 창녕 조씨이다. 화왕산에는 용지가 있다. 창녕조씨 시조 탄생지라고 전해 온다.

    족보상에는 조계룡의 부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진평왕의 딸인 천명과 선화는 그 남편이 확연히 기록되어 있고 실제 인물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덕만공주의 남편 즉 선덕여왕의 남편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음갈문왕. 경주김씨 족보에 의하면 김인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계룡이 진평왕의 사위라는 기록은 창녕조씨 족보, 경주이씨족보, 경주김씨 족보상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8. Favicon of http://hera282.com BlogIcon hera 2009.08.07 1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서 덕만은 유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리고, 춘추보다도 어렸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닌거 가튼데 ^^

    김춘추가 29대 왕이고 덕만이 27대 왕이구요, 유신이 춘추의 딸(지소부인) 과 혼인했는데 어찌 덕만이 김유신, 김춘추 보다 나이가 어린지 ^^;;

    제 생각엔 덕만 > 유신 > 춘추 이 순서가 아닌가 싶은데요;

  9. Favicon of https://easygoing39.tistory.com BlogIcon 카타리나^^ 2009.08.21 22: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혼했다는것도 처음 알았네요 ㅡㅡ;;
    그렇군요...

  10. 레아 2009.10.18 1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만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게 아니며 덕만이 진평왕을 대신해 섭정을 한것을 왕위에 오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 Favicon of https://dreamlives.tistory.com BlogIcon 갓쉰동 2009.10.19 2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진평왕은 죽었는데 무슨 섭정을 합니깡..유흔통치라면 모를깡.. 그렇다고 해도.. 죽음 다음대 임금이 되는거지용.. ㅋㅋ

  11. Favicon of http://www.bestvibramshoes.com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2. Favicon of http://wennanieto.typepad.com/blog/2012/04/survival-sets-how-to-pick-the-best... BlogIcon food storage supplies denver 2012.11.01 1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이종욱이.. 왜 이리 허점 많은 설을 유포하는지 모르겠어요..님이나 이종욱처럼

  13. Favicon of http://www.telegraph.co.uk/education/3357189/Free-time-10-ways-to-reclaim-the-.. BlogIcon cost of owning a dog vs cat 2012.11.05 16: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비후생인 덕만이 우선권이 있었고, 덕만이 진평왕의 <장녀>로 <삼국사기>에 기록

  14. Favicon of http://www.cheaphelmetsonlineshop.com/ BlogIcon cheap helmets 2012.12.10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5. Favicon of http://elwirahayes.posterous.com/disaster-emergency-kits-for-handicapped-and-e BlogIcon 72 hour kits for kids 2012.12.10 21: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한, 아무리 미국이 광우병내성을 지니고 있더라도 유전적 결함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발견되어야 하는 광우병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도축되기전에 소멸되었거나 도축과정에 은폐되거나 검역과정에 통과되어 전세계 식탁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16. Favicon of http://quarterempty.wordpress.com/2007/08/ BlogIcon great web site designs 2010 2012.12.22 1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꾸 침대위로 올라가서 먹으려고 하는 바람에.. 내 앞발을 빌려주었다. 흠.. 근데 다른 강아지들은 등뼈 주면 살살 갈아

  17. Favicon of http://principealverto.com/camping-and-the-right-food-for-a-long-weekend/ BlogIcon emergency preparedness kits victoria bc 2012.12.31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부러 아래와 같은 시리즈 기사들을 송고했던 것이다.

  18. Favicon of http://principealverto.com/camping-and-the-right-food-for-a-long-weekend/ BlogIcon emergency preparedness kits victoria bc 2012.12.31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부러 아래와 같은 시리즈 기사들을 송고했던 것이다.

  19. Favicon of http://dailymiaminews.com/category/news/ BlogIcon Daily News 2013.03.13 0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상적 내용과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유용한 생각과 다른 사람에게 아이디어를 공유 할 정말 작가를위한 훌륭한 작품입니다.좋은 일을 계속.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김대문의 <화랑세기>는 화랑 풍월주의 계보와 풍월주들의 활약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8대 풍월주인 문노는 화랑의 체계를 세운인물이고, 전쟁에 나아가 무수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문노의 출신은 나물왕의 후손인 비조부의 아들로 대가야국의 외손이다.

 

8세 문노(文弩:538생)는 비조부공(比助夫公)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야국(加耶國) 문화공주(文華公主)인데 문화공주는 야국왕(野國王)이 바친 여자(貢女)라고 한다.

 

공은 건복(建福) 23년(606)에 세상을 떠나니 69세였다. (윤공)낭주는 이 해에 공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선(仙)이 되었다. 공보다 10살이 적었다.

 

하지만, 문노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김흠운열전>에 잠시 모습을 보일 뿐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화랑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된다. 문노를 빼고 나면 화랑세기 자체가 성립할 수 없도록 되어 있으며 문노의 세계가 잘못되었다면 화랑세기가 위서로 몰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김부식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인용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문노가 빠졌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서임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김춘추의 사위 김흠운은 문노의 제자?

 

그래서 문노와 김흠운의 관계를 규명함으로서 화랑세기의 진위논란에 한발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의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영휘(永徽) 6년(무열왕 2: 655) 태종대왕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변방을 막자 이를 치고자 하여 군사를 출동할 때에 흠운을 낭당(郎幢) 대감으로 삼았다. 이에 그는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병졸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하였다. 백제 땅 양산(陽山)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여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백제인들이 밤을 틈타서 민첩하게 달려와 새벽녘에 성루를 따라 들어오니 우리 군사가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적들이 혼란을 타서 급하게 공격하니 날으는 화살이 비오듯 모여졌다.


흠운이 말을 비껴타고 창을 잡고 대적하니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달래어 말하였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일어나 지척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이니 공이 비록 죽는다고 하여도 알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공은 신라의 귀한 신분[貴骨]으로서 대왕의 사위[半子]인데 만약 적군의 손에 죽으면 백제의 자랑하는 바가 될 것이고 우리들의 깊은 수치가 될 것입니다.”


흠운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하였으면 사람이 알아주고 모르고는 한가지이다. 어찌 감히 이름을 구하랴?” 하고는 꿋꿋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따르던 자들이 말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하였으나 흠운이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몇 사람을 죽이고 그도 죽었다. 이에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少監) 적득(狄得)이 서로 더불어 함께 전사하였다. 보기(步騎) 당주 보용나(寶用那)가 흠운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말하였다.


“그는 귀한 신분에 영화로운 자리에 있어 사람들이 아끼는 바인데도 오히려 절조를 지켜 죽었으니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 있더라도 별 이익이 되지 않고 죽어도 별 손해가 되지 않는 존재이다.” 드디어 적에게 덤벼들어 서너 명을 죽이고 그도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고 흠운과 예파에게는 일길찬, 보용나와 적득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전투상황]을 듣고 양산가를 지어 애도하였다.

 

여기서 김흠운과 문노와의 관계가 조금 의심스런 점이 발견된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문노는 법흥왕 25년 538년생이고, 몰년은 진평왕 28년 606년으로 69세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흠운열전에는 김흠운이 어릴적에 화랑 문노의 문하에 있었다하고 655년 정월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여 30여개 성을 빼았다. 이에 신라는 군을 모집해서 백제의 양산에서 조천성를 공격하다 오히려 백제군에 의해서 신라가 처참히 깨지고 김흠운도 죽은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만약, <화랑세기>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김흠운이 어릴적 문노의 문하에 있었다고 한다면, 김흠운은 문노가 죽은 606년 이전에 나이가 최소 10~15세 전후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655년 죽었을 때 나이는 60세 전후의 노장이 될 수밖에 없다. 김흠운의 나이때로 보았을 때 595년생인 김유신과 동년배여야 한다. 그런데 김흠운이 움직이는 군대가 <낭당대감>이다. 낭당대감이란 화랑의 무리를 이끄는 총관의 다른 표현이거나 낭당총관의 밑이다. 김흠운의 신분이 나물왕의 8대손이고 달복공의 아들이며 태종대왕의 반자(사위?)라고 했으니 귀한 집 자손임에 분명하다. 문제는 김흠운의 죽은 시점의 나이와 신라의 계급적인 특성으로 보았을때 60대의 노장이 화랑을 이끄는 낭당대감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죽고 난 후 추증된 일벌찬이 신라의 관등으로 7등급에 해당 할 수 없다..  또 한가지 간과하지 못한 것은 화랑이랑 신라귀족 자제들의 집단이므로 문노가 늙어 죽을 때 인 69세(606년)까지 화랑을 이끌었다고 볼 수 없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8대 풍월주인 문노가 582년 비대전군의 아들인 비보랑에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었다고 하였음으로 문노는 582년 이후 화랑의 계보상 상선이 되었음을 의미하고, 화랑의 지위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문노의 문하에 있었다는 김흠운의 기록은 문노가 화랑이였을 때 김흠운이 문노의 문하에 있었다고 해석한다면 김흠운의 나이는 655년 80세 이상의 노령이 됨으로 더더욱 <삼국사기>와 <화랑세기>가 충돌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김흠운이 죽은 시점에 화랑을 이끄는 낭당대감이고 죽은 후 일벌찬이 되었다면 655년 나이가 10대 후반에서 20~30세 전후여야 합당하다. 또한 달복공의 또 다른 아들이고 김유신의 사위인 흠돌이 처음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661년 7월 고구려 공격군으로 대장군 김유신과 대당장군 흠돌의 기록을 상기해 볼 때 흠돌과의 나이 차이가 많을 수 없어야 한다.

 

또한, 흠돌은 김유신의 딸인 진광에 장가가서 김유신의 사위가 되는 인물이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652년 26대 풍월주 진공의 부제가 되고 657년 27대 풍월주에 오른 인물이다. <화랑세기>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흠운은 흠돌보다는 나이가 적었다고 보아야 합당하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달복공은 김서현의 막내이고 김유신의 막내동생인 정희에 장가를 들어 흠돌을 낳았다고 하였다. 미루어 짐작컨데 김흠운도 정희의 소생일 가능성이 많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딸인 진광에 장가들고, 김흠운은 <삼국사기>에 655년 당시 대왕(김춘추2년)의 반자(사위?: 반만 자식이라 했으니 사위일 것이다)라고 했으니 김춘추는 문희에 장가를 들기전에 고타소랑을 제외하고도 또 다른 자식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서현의 3녀인 문희(문명왕후)의 소생인 지조가 김유신의 부인이 되는 시점이 655년 12월 유신의 한갑 때이니 김흠운의 처는 문희의 소생이 될 수 없음이 명확해진다. 김춘추는 542년 대야성에서 딸인 고타소랑과 사위인 품석을 잃고 655년 백제의 양산 조천성 전투에서 또 다른 사위인 김흠운을 잃었다고  하겠다. 2명의 사위를 백제에 잃었으니 김춘추의 속이 어찌 되었을 지는 미루어 짐작하겠다. 그 후 김춘추는 당에 구원병을 청하고 고구려와 백제를 적극 공략한다.

 

어찌 되었던 김흠운에 대해서 <삼국사기>와 <화랑세기>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화랑세기가 박창화의 지어낸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들여다 보면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는 충돌되지 않고 있다고 봐야한다. <화랑세기> 27대 김흠돌 풍월주의 기록에 보면 당시 화랑의 적통이 문노에서 이어져온 가야파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8대 풍월주  문노는 화랑의 세계에서는 가야파의 종주가 되는 인물이다. 또한, 문노파는 무를 숭상하고 전쟁에 나아가 공을 세우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는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이부분이 흠운과 문노를 갈라놓은 지점이다. 흠운이 어려서 문노의 문하에 있었다면  <화랑세기>에 기록된 8대 문노는 538년에서 606년 사이에 활동한다면 김흠운이 655년 죽었을 때 나이가 얼마인데..60에서 80대인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화랑세기>가 위서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 버린다. <화랑세기>는  문노에 의해서 씨줄과 날줄이 얼키고 설켜 있으니 <화랑세기>는 박창화의 정교한 창작품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歆運少遊花郞文努之門 時 徒衆言及某戰死 留名至今 歆運慨然流涕 有激勵思齊之貌 同門僧轉密曰 “此人若赴敵 必不還也”

<<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당신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

 

문노가 화랑으로 활동하는 시점인 538년부터 ~ 576년~582~606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노는 대가야의 외손이다. 하지만 이사부와 사다함에 의해서 외가인 대가야가 562년에 망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562년 문노의 나이 25살인 점을 고려해볼 때 사다함과 같이 출전했을 수도 있으나, 화랑세기에 의하면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어쩌면 대가야가 힘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신라에 멸망한 이유는 가야제국들과 신라가 혼맥으로 이뤄져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대가야는 물론, 금관가야도 신라와 혼맥으로 이뤄져 있었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도 변한과 진한인들이 서로 잡거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가야국들이 신라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 같다.


<삼국사기>에도 있지만 사다함과 그 일파들을 말하는 것이고 무를 추종하는 문노의 계파로  전쟁에 나아가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하고 죽은 수많은 화랑들을 말한다.



당시의 무리란?

 

655년 전 김흠운에 속한 화랑의 무리를 말한다.

 

좀더 들어가면 <화랑세기>에는 652년 김흠돌이 화랑의 부제였을 시점이니 형으로 추정되는 김흠돌에게서 위대한 화랑들에 대해서 들었을 수도 있고, 652년 26대 풍월주였던 김진공의 무리들에게 들었을 수도 있다.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한 것은 <김흠운이 어렸을 때 문노를 따르고> 하였다는 것은 문노가 추구하는 무를 숭상하고 전쟁에 나아가 공을 세우거나 죽는 것을 계승하여 따랐다는 의미 밖에는 없다.


602년 아막성 전투에서 원광법사에 사사받은 취산과 추항이 화랑으로 참전하여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김흠운 싸움에 임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화랑의 세속오계 중 하나인 <임전무퇴>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留名至今" (유명지금) :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다.

흠운이 배울 시점까지 이름을 남겼다는 것은 문노와 흠운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의미이지 문노에게 직접 사사를 받았다는 의미는 더더욱 될 수 없다. 


해석상의 문제

  

歆運少遊花郞文努之門 時 徒衆言及某戰死

많은 사람들이 위의 내용을 “흠운이 어릴적 화랑 문노의 문하에 있었는데, 당시 따르는 화랑들이 말하길 전쟁에 나아가 전사하였다.”는 식으로 번역을 한다.

하지만, 遊花郞, 文努之門 유화랑(遊花郞)과 문노지문(文努之門) 사이를 끊어 읽어야 한다.


歆運少遊花郞, 文努之門 時 徒衆言及某戰死

흠운은 어릴적 화랑에 있었다. 문노의 화랑 때 전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따르는 무리들이 이야기를 전했다.

 

PS. 문노는 내물왕의 후손인 비조부의 아들로 나온다. 사다함도 내물왕의 6대손인 구리지의 아들이니 7대손이다. 김흠운도 내물왕7대손인 잡찬 달복의 아들인  8대손으로 나온다.

한마디로 내물왕을 빼고는 신라를 말할 수 없고, 세종대왕 만큼이나 자손을 많이도 낳았다.

 

 

여전히 진위를 알 수 없는 화랑세기

 

글쓴이는 문노와 김춘추의 아들이 김흠운의 사망사건을 계기로 화랑세기의 진위를 살펴보고자 했다. 하지만, 화랑세기와 삼국사기가 충돌될것 같았던 기록들이 여전히 잘 끼워 맞춘것 처럼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찌되었던 신문왕비가 되는 신목왕후가 김흠운의 2녀가 된다는 기록과 <화랑세기>문노와 <삼국사기>와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문노와 김흠운의 관계로 <화랑세기>가 박창화가 창조한 위서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김부식이 고의이던 자료의 부족을 느꼈는지 관계없이 문노가 <삼국사기>에 이름만 남긴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자의태후는 681년 8월 <김흠돌의 난>이 있고 나서 군사 지향적인 화랑을 폐기한 것은 분명하다. 그 후 화랑의 형태는 산천 유람하고 선도와 문에 힘쓰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고 역사적 자료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미실과 덕만의 하늘살핌 대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을 죽이기 위해서 터미네이터처럼 따라다니다. 덕만에 의해서 죽은 줄 알았던 칠복이 사신단과 함께 온 상인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들 사신단은 수나라일까? 당나라 사신단일까? 역사를 종횡무진 필요할때 마다 이동하는 드라마 선덕여왕으로 보았을때 알 수 없다가 정답이다.

칠복으로 인해 덕만의 정체가 미실에 보고되니 흥미가 배가 되지 않을까한다.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이 아막성 전투에서 살아난 이유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에 의해서 구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문노를 따르는 무리이거나 덕만이 비를 내리게 해준 가야의 유민이였을 가능성이 있다. 칠복이 돌아 왔으니 문노도 나타날때가 되었다.

 

사다함이 미실에게 전해준 ‘매화’가 ‘책력’이라면, 작가는 당시 신라시대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닐까? 하늘에 제를 올리고, 하늘을 살피는 것은 왕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사항이다. 이를 서포터즈 하는 역할이 천관의 역할이다. 미실이 하는 일이 하늘과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역할이니 책력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를 갖추게 해준 이가 사다함이라고 한 것이다. 미실이 신라의 국정에 깊이 개입하는 계기가 진흥이 기후제를 지냈지만 비가 오지 않았다. 미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비가 오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덕만이 만노군에서 가야의 유민들에게 잡혀 하늘에 기우제를 지낼 때 잠깐 비춰진 것이 책력이였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같지 않는가?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하늘을 살피는 책력을 만들려고 했다. 이때 보조자료로 사용된 것이 회회력과 칠정산이였다. 책력은 황제(제왕)도였다. 덕만이 가져온 책력이 미실이 받은 책력보다는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인가? 아무튼 미실과 덕만의 ‘하늘살핌’ 대결을 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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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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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sayinme.tistory.com BlogIcon 사용인 2009.07.07 17: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

  2. Favicon of http://www.toeshoesvibram.com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5 1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불당 사건으로 세종은 후일 “늙어서 망년이 들었다”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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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Favicon of http://www.bestvibramshoes.com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4: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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