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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계백, 김유신 황산벌 임하는 자세 신라.백제 국운을 갈랐다. 은 백제의 마지막 충신으로 추앙받는 계백의 일대기를 재조명하는 기획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계백에는 충신 계백도 없었고, 영웅 계백도 없었다. 사실 에서 영웅의 일대기를 그린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 했었다. 왜냐하면 역사에 기록된 계백은 많이 봐줘서 충신일 수는 있어도 전쟁영웅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 계백도 그리지 못했고, 의자왕도, 은고도 그려내지 못한 게도 놓치고 우럭도 놓친 이도 저도 아닌 정체불명의 3각관계만 부각하고 시청률까지 놓친 총체적 부실덩어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계백이 오천의 군사로 신라의 5만 군대에 맞서 4번의 승리를 했기 때문에 중과부족에 힘을 다해 싸웠지만, 패했으니 어쩔수 없는 패배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오합지졸 5만과 별동대 오천의 구성을 보면 이야기는.. 더보기
계백, 부여복신, 무왕과 의자왕 어머니 선화공주 사랑 없었다 증언하다? 에서 무왕이 드디어 선화공주의 아들인 의자왕자를 세자로 내세운다. 의자가 세자가 된때는 무왕 33년 632년, 정월 이었다. 의자왕자는 30살이 넘어서 세자가 된것이다. 그런데, 의자왕은 무왕의 큰아들이였을까? 대부분 태자는 성년이 되기 전에 미리 찜해두는게 관례이다. 그래야 왕실이 안정이 되고 후계싸움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무왕은 의자왕을 30살이 넘도록 두고 보고 있다가 즉위 33년이 된 때에 의자를 태자로 책봉한 것이다. 그래서 처럼 왕자들간에 싸움이 있었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백제의 왕자나 태자들은 대부분 왜에 출장을 가는 경우가 많다. 백제 태자들을 찾는건 삼국사기에서 보다 일본서기에서 찾는게 더 빠르고 여러왕자들을 볼수가 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후 백제부흥군을 이끄는 부여풍(장)은.. 더보기
계백, 의자왕, 반란 실패한 사택비 죽고, 교기 왜로 쫓겨난다? 공주의 남자를 비롯해서 계백에서도 기본적인 팩트를 무시하는 작가의 자의적인 망상 사극이 철찬리에 방송중이다. 드라마 에서 당나라 사신으로 공손사가 등장한다. 공손사는 631년 봄 당나라 광주자사였지만, 고구려 사신으로 간다. 수나라와 대결한 고구려가 수나라를 물리치고 경관을 설치였었다. 고구려에 간 공손사는 경관을 없애 줄 것을 청원하고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경관해체작업에 동의를 하고 없애준다. 이런 공손사가 백제 사신으로 오면서 자신이 한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냥 공손사의 말은 스쳐 지나면 된다. 단지, 계백에서 현재 시제가 언제인지만 알면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드라마 계백의 시제는 631년이라고 친절히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백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몇.. 더보기
공주의 남자, 승유, 의자왕, 계백, 교기, 수염만 없으면 미성년인가? 그리고 언제나 김유신은 노예상? 백제는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기 위해서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한다. 여러날 공격하지만, 효과가 없다. 교기와 의자는 1만명을 충원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려고 충원한다. 극중 어디를 봐도 1만명 이상의 충원군이 동원되었는지는 알수 없다. 그냥 대사처리이니 그러려니 하자, 이에 맞서 김유신과 김유신의 포로병인 계백이 고구려 낭비성을 깨고, 가잠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출동한다. 김유신과 교기가 전투하다 교기가 의자를 죽이려는 함정으로 의자를 대신 김유신과 대결하게 한다. 김유신은 알천의 반대를 무릎쓰고 포로인 계백을 의자와 싸우게 한다. 계백은 의자를 죽이려 하지만, 이때 윤충이 나서 의자를 구하고 백제 진영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왜 사극에서 중요인물들은 다들 노예 아니면 검투사 인가? 광개토태왕에선 담덕이 .. 더보기